최근 선관위가 선출직 선량에 대한 축·조의금 지출을 감시하겠다고 나서자 저마다 엇갈린 반응과 함께 고민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현실과 동떨어진 법도 문제지만 그동안 우리들의 잘못된 의식이 더 큰 문제였다. 선출직에 나서려면 그 대상자들에게 잘 보이고 잘 대접해야 한다는 현실은 그들 스스로가 도둑이 되라는 얘기와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서지 못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맡기고 심부름시키려면 오히려 심부름 값을 내놓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달라고 하니 그들이 처음부터 심부름 잘하기란 일찍부터 틀렸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잘 지켜질 것 같지도 않은 1만5천원 이하의 물품으로 선출직들에게 애·경사를 대처하도록 기부금품관련법을 제정했을까 싶다.
조선조 선비들이 공맹(孔孟)을 앞세워 짜놓은 예론을 보면 빡빡하고 딱딱한 규범들로 숨통이 막힐 지경이다. 자유로움이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사람을 꽁꽁 얽어매려고만 했다. 남녀가 칠세가 되면 한자리에 앉지도 말라는 법은 <논어>의 어느 구석에도 없다. 공자는 사람을 얽어매지도 않았고 오히려 걸림없는 내면을 간직하게 하였다. 불가의 선(禪)에서만 내면의 자유가 주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자의 절사(絶四)에서도 걸림 없는 내면의 자유를 확인할 수가 있으며, 인심(仁心)이 곧 해탈이라는 것을 공자의 절사로 잘 알 수 있다.
"속사정을 모르겠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저의가 무엇일까?" 우리는 대부분 한사람을 두고 이렇게 떠보려고 하거나 저울질하기 일쑤이다. 사람마다 의도를 간직하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는 까닭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만나면 서로가 이해를 따지고 약점을 노리기에 공자는 이러한 수작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서로가 숨기거나 감출 것이 없다면 그 어느 것에 매일 것도 없다. "목숨을 걸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해치워야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중대한 일이 생기면 막다른 골목을 만들어 놓고 배수진을 치는가하면 배수진이 무너지면 물귀신 작전을 쓴다. 그리고 자기 탓은 잊어버리고 남을 원망하거나 팔자타령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며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안다면 무슨 일이든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목숨을 담보로 배수진을 치는 허욕을 부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하늘이 무너져도 해야하는 것은 없다<母必>고 제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벽창호다. 앞뒤가 꽉 막혔다. 제 생각만 하지 남의 생각을 모른다." 이것은 고집스러운 사람에게 던지는 험담이다. 사람의 일은 서로 얽혀있게 마련인데 매듭을 풀지 않으려 하면 실타래는 끊어진다. 이 말은 사람의 관계나 일이 끊어지지 않고 잘 풀리려면 서로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한다는 것으로 공자는 이를 이순(耳順)이라 하고, 무엇이든 고집할 것이 없으면 사로잡힐 것도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세상에는 무수한 탈이 생겨났다. 모든 것을 내가 정하고 남의 생각은 틀렸고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하기야 우리는 나를 버렸다고 공언(公言)하기도 하고 마음을 비웠다고 선언하는 사람을 종종 보아오지만 속셈은 언제나 딴전에 두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참으로 나를 버린 사람은 막힐 것도 없고 매일 것도 없다. 이것을 우리는 무심이라고도 하고 허심 또는 무아라고도 한다. 무아는 자유의 절정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민주주의 꽃이라 불리는 지방자치와 그에 따른 자유를 만끽하려면 이제부터라도 서로가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반성하고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유권자나 선출직 선량 모두는 수작을 부리지 말고, 배수진을 치지 말고, 마음을 비워야한다. 그러면 오늘날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법으로 인한 서로의 오해가 없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한 고민도 사라질 것이다.
조선조 선비들이 공맹(孔孟)을 앞세워 짜놓은 예론을 보면 빡빡하고 딱딱한 규범들로 숨통이 막힐 지경이다. 자유로움이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사람을 꽁꽁 얽어매려고만 했다. 남녀가 칠세가 되면 한자리에 앉지도 말라는 법은 <논어>의 어느 구석에도 없다. 공자는 사람을 얽어매지도 않았고 오히려 걸림없는 내면을 간직하게 하였다. 불가의 선(禪)에서만 내면의 자유가 주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자의 절사(絶四)에서도 걸림 없는 내면의 자유를 확인할 수가 있으며, 인심(仁心)이 곧 해탈이라는 것을 공자의 절사로 잘 알 수 있다.
"속사정을 모르겠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저의가 무엇일까?" 우리는 대부분 한사람을 두고 이렇게 떠보려고 하거나 저울질하기 일쑤이다. 사람마다 의도를 간직하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는 까닭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만나면 서로가 이해를 따지고 약점을 노리기에 공자는 이러한 수작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서로가 숨기거나 감출 것이 없다면 그 어느 것에 매일 것도 없다. "목숨을 걸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해치워야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중대한 일이 생기면 막다른 골목을 만들어 놓고 배수진을 치는가하면 배수진이 무너지면 물귀신 작전을 쓴다. 그리고 자기 탓은 잊어버리고 남을 원망하거나 팔자타령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며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안다면 무슨 일이든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목숨을 담보로 배수진을 치는 허욕을 부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하늘이 무너져도 해야하는 것은 없다<母必>고 제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벽창호다. 앞뒤가 꽉 막혔다. 제 생각만 하지 남의 생각을 모른다." 이것은 고집스러운 사람에게 던지는 험담이다. 사람의 일은 서로 얽혀있게 마련인데 매듭을 풀지 않으려 하면 실타래는 끊어진다. 이 말은 사람의 관계나 일이 끊어지지 않고 잘 풀리려면 서로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한다는 것으로 공자는 이를 이순(耳順)이라 하고, 무엇이든 고집할 것이 없으면 사로잡힐 것도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세상에는 무수한 탈이 생겨났다. 모든 것을 내가 정하고 남의 생각은 틀렸고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하기야 우리는 나를 버렸다고 공언(公言)하기도 하고 마음을 비웠다고 선언하는 사람을 종종 보아오지만 속셈은 언제나 딴전에 두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참으로 나를 버린 사람은 막힐 것도 없고 매일 것도 없다. 이것을 우리는 무심이라고도 하고 허심 또는 무아라고도 한다. 무아는 자유의 절정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민주주의 꽃이라 불리는 지방자치와 그에 따른 자유를 만끽하려면 이제부터라도 서로가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반성하고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유권자나 선출직 선량 모두는 수작을 부리지 말고, 배수진을 치지 말고, 마음을 비워야한다. 그러면 오늘날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법으로 인한 서로의 오해가 없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한 고민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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