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응급실에 1분만 늦게 도착했어도 난 이 자리에 없어. 그때 날 살려준 의사 선생님한테는 아직도 정말 고마워.”
택시기사인 박0태(54, 남)씨는 지난해 12월 새벽 갑작스레 심장이 멎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다행히 그의 아내가 재빨리 정읍 아산병원 응급실로 데려갔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그는 이후로 새벽에 응급실로 가는 손님이 택시를 탔을 때에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운전하고 때에 따라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이런 박 씨의 생명이 다시 살아난 곳은 정읍에서 유일하게 24시간 응급실이 있는 정읍아산병원. 정읍시민이라면 살면서 한 번쯤은 와본 곳이다. 정읍아산병원 응급실은 휴일과 주말, 그리고 새벽까지 정읍시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환자들의 삶과 죽음의 경계가 결정지어지는 이곳, 정읍아산병원 응급실의 24시를 돌아본다.

(주)정읍신문

▲술, 응급실의 불청객
기자가 응급실에 도착한 저녁. 연말연시가 되면서 모임이 잦아지는 만큼 술로 인한 복통과 폭행 등 사고로 오는 환자들이 많았다.
술을 마시다가 구토 증상과 함께 위가 아파서 온 30대 남성인 김모 씨. 복통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함께 술을 마시다가 놀라서 온 친구들이 더 당황해 접수도 제대로 못 하고 우왕좌왕한다. 취기가 풀리지 않는지 아픈 친구를 앞에 두고 농담까지 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던 아산병원 관계자는 “술 취해서 왔는데 이 정도면 애교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통 야간·새벽 시간에는 취객들이 많이 온다. 얌전히 치료받고 가면 좋겠지만 고성방가에 난동을 부리고 심지어는 의사나 간호사를 폭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대한응급의학회지가 2010년 전국 응급의학과 의사 39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0.7%는 폭언을, 50%는 폭력을 경험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 중 응급실 폭력의 절반 이상이 주취 환자들에 의해 발생했다. 취객들의 폭력은 의료진의 사기를 떨어뜨려 전공의 지원율과 간호사 이직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심각한 문제다. 이에 경찰은 지난 9월 서울 지역에서만 운영하던 ‘주취자 원스톱 응급의료센터’를 전국 6개 광역시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업무과 관계자에 따르면 심야에만 취객들이 오는 것이 아니라 노숙자들도 아침부터 점심, 때를 가리지 않고 온다고 한다. 심지어 하루에 두세번 오는 응급실 ‘단골’ 주취자들도 있다.
취객들에 대해 이야기하자 한 간호사는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와 있다”며 “눈만 마주쳐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기 때문에 구석에 있는 침대로 배치해놨다”고 말했다.
또 “어제처럼 큰 교통사고로 중증 환자들이 많을 때는 정말 정신이 없다”며 “이 와중에도 취객들이 와서 진료를 방해하면 정말 화가 난다”고 말했다.

▲노인 환자 대부분… 겨울철 ‘낙상’ 주의해야
정읍 지역 특성상 고령자가 많아 응급실 환자의 대부분이 노인이었다. 이 중에서도 낙상으로 인한 사고의 비중이 컸다. 최근 폭설과 한파로 인해 빙판에서 넘어지거나 야외활동이 급격히 줄어들어 집 안 혹은 실내에서 낙상을 당한 것.
길바닥이 미끄러워 생기는 겨울철 낙상은 대부분 뒤로 넘어진다. 노인들은 골밀도가 낮은 만큼 젊은 층에 비해 뼈가 부러질 확률이 최고 30배 높아 특별히 주의를 요구한다.
뒤통수에 출혈이 심해 응급차로 들어오던 70대 남성 최모 씨도 빙판길에서 낙상을 당했다.
이미 병원에 입원해 있던 최 씨의 아내는 환자복을 입은 채로 다급히 응급실에 왔다. 다행히 CT 촬영 결과 큰 이상은 없었다. 곧이어 온 최 씨의 자녀들은 뒤통수에 찢어진 부위가 크고 밤사이에 이상이 생길지 모르니 하루 저녁 입원하라고 권고했으나 최 씨는 “난 괜찮다. 돈 들어가는데 무슨 입원이냐”며 완강하게 거절했다.
당장에 아프지 않은데 왜 굳이 돈 써가면서 입원해야 하냐는 부모와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느냐며 두고 봐야 한다는 자녀들의 실랑이는 다른 노인 환자들에게도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병원 업무과 관계자에 따르면 겨울과 일교차가 클 때 노인 환자들이 특히 많다고 한다. 면연력이 약하고 젊은이들처럼 빨리 대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옆집에 있던 할머니가 어지럼증을 호소해서 데려왔다는 80대 임0순 할머니는 옆집 할머니가 링거액을 다 맞을 때까지 무려 7시간을 응급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옆집 할머니 자녀들은 서울에서 이제 출발했다고 한다.
임 씨는 “노인들에게 겨울은 무서운 계절”이라며 “나도 지난해 12월 28일에 넘어져서 팔이 부러져 응급실에 왔었다. 그런데 아직도 낫지 않고 이렇게 아프다”고 팔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임 씨는 이어 “아프지만 않으면 굳이 응급실까지 와서 치료받고 싶지 않다. 우리 노인들은 그냥 이렇게 살다 죽으면 되는데…….”라며 쓸쓸히 웃었다.
아산병원 관계자는 “간혹 집에서 홀로 돌아가셔서 나중에 발견돼 오는 노인분들이 있다”며 “병원에서도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안타까운 경우”라고 말했다.(이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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