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위원 박기웅

 

 

- 박기웅 칼럼 - 

누가 빠져야 할까

 

 

수업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철학에 관한 한편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난파당하게 되었다.

배가 난파당하지 않기 위해선 누군가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

누가 죽어야 하는가.

누군가 선장이 빠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누가 배를 운항하는가.

누군가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빠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암 연구로 인류의 생명 연장에 공이 많은 의사였다.

누군가 전과자가 빠져야 한다고 말했다.

배는 서서히 기울고 있다.

누가 죽어야 하는가.

글은 계속되었다.

공리주의자 벤담은 전과자가 죽어야 한다고 주장했을지 모른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를 모토로 한 공리주의자의 입장에서 전과자는 가장 쓸모 없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칸트라면 차라리 모두 같이 죽자고 말했을지 모른다. 도덕적 규범으로서의 정언 명령은 언제 어느 때 보아도 타당해야 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 대한 요구는 자신도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 정당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그 질문 자체를 부조리한 것으로 보았을지 모른다. 실존을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삼는 그에게 실존 자체를 부정하는 이러한 질문은 그 자체가 부조리했을 것이다.

니체라면 결국 치고 받고 하다가 가장 나약한 사람이 빠져 죽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지도 모른다. 그에겐 초인(超人)만이 중요했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누가 빠져야 할까.

대다수 아이들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맞다. 예상대로 대다수 아이들은 바다에 빠져야 할 사람이 전과자라고 대답했다.

어떤 아이는 제법 휴머니스트처럼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위급한 상황 앞에서 어떻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을 수 있느냐는 거였다.

그밖에도 이런저런 대답이 많았는데, 특히 한 아이의 대답이 기억에 남았다.

그 아이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전과자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기 전에 틀림없이 누군가 ‘내가 빠질게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믿고 싶어요.”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나는 빙긋이 웃었다. 천진난만하면서도 엉뚱한 대답이었다.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에 나오는 에피소드였던가. 배가 난파되었을 때, 한 선교사가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옆에 있던 사람에게 주고 자신은 죽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젊음이 주는 치기 때문이었는지, 그런 상황이 되면 나도 뜨거운 마음으로 조끼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다.

종종 이런 실존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때가 있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가. 사실 이런 추상적 질문이 현실에서 별로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평소 대의를 위해 이 한 목숨 바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살았더라도 어떠한 결단의 순간에 그것을 실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하나의 우화에 불과하다. 아마도 삶의 성과나 가치 여부에 따라 죽음의 가치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회의 무의식적 합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토마스 만은 ‘한 인간의 죽음은 그 자신보다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죽는 순간, 죽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어쨌든 현실 세계에서는 죽음이 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 자들에게는 그것이 의미가 된다. 산 자들에게 의미가 된다는 것은, 어떤 죽음이 역사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저는 전과자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기 전에 틀림없이 누군가 ‘내가 빠질게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믿고 싶어요.”

이제 나는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는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일 만큼 순진하지 않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그 아이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실제 그 배에서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또 내가 바로 '그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믿음에 대한 희망조차 갖지 못하겠는가.

한 가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배가 누구의 희생도 없이 살아남았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희생이나 죽음으로 유지되는 사회는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가 바다에 내던져야 할 사람으로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선택한다면 이 천박한 사회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징후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한다. 배는 언제나 바다 위에 떠 있고 균형을 잃은 배는 좌초된다는 것을.

 

-칼럼위원 박기웅

서영여고 교사

번역가

전 군산서해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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