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오래 전 일이다.

고등학교 1학년 담임을 맡고 있을 때였다. 우리 반 아이 하나가 신발을 분실했다. 이는 여러 종류의 아이들이 모여 사는 학교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신발뿐만 아니라 때로는 돈도, 체육복도 분실하는 경우가 있다. 신발을 잃어버린 그 녀석은 며칠 동안 신발을 찾아 학교를 헤집고 다녔다. 며칠 뒤, 녀석이 신발을 찾았다며 나를 찾아 왔다. 자신의 신발이 2학년 교실 신발장에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 교실로 가 신발의 주인을 불러냈다. 한 녀석이 복도로 나왔다. 그런데 그 녀석은 그 신발이 자신의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자 우리 반 녀석도 그 신발이 분명 자신의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난감했다. 두 녀석 중 하나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모순되는 두 개의 주장을 하는 아이들을 보자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전에도 분실 사건이 여러 번 있었던 터라 나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도둑(?)을 가려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마치 형사처럼 다그쳐 물었다. 그러자 우리 반 녀석은 굽이 떨어져 본드로 붙인 자국, 신발 모양 등을 말하며 자신의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비해 2학년 녀석은 우물쭈물하며 그것이 자신의 신발임을 적극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 나는 그 신발이 우리 반 아이의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됐다. 하지만 함부로 그 2학년 아이를 도둑으로 몰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어떤 조치를 취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그 아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가게에서 신발을 구입했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구체적인 정황을 따라가다 보면 신발 주인이 명백하게 가려질 거라 생각했다. 우리 반 녀석은 그 신발의 디자인이 일반 학생화와 달라서 이 지역에는 없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고, 2학년 녀석은 이 지역에서 신발을 샀다고 말했다. 나는 일단 두 아이를 다독인 후 그 신발을 가지고 교무실로 왔다. 그 신발을 가지고 신발 가게에 가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이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자칫, 한 아이가 ‘확실한’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럴 경우, 그 아이는 견디기 힘든 수모와 수치 속에서 견디기 힘든 학창시절을 보내야 할 것이 뻔했다. 어쩌면 평생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둑의 멍에를 지고 살아야 할 것이었다. 나는 여러 동료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그 신발을 들고 신발가게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만일 이 지역 신발가게에서 그런 종류의 신발을 팔지 않는다면, 그 2학년 아이는 명백하게 도둑으로 몰릴 것이었다. 어쨌든 그때까지의 상황으로 봐서는 2학년 아이의 혐의가 짙었다. 도둑을 확인하는 일과, 도둑으로 확인됐을 때의 결과 사이에서 나는 후자를 더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어두운 시기는 있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용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신발 주인을 가려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편으로 한 아이의 뻔뻔한 거짓말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어렸을 적의 좋지 않은 버릇을 눈감아주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냥 모든 판단을 미뤄두기로 했다. 그 아이는 아직 성장의 기회가 많이 남아있는 ‘미성숙한’ 고등학생이었다. 결국 그 신발은 학교 규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학생부’에서 보관하기로 하고, 모든 일은 일단락되었다. 다행히 우리 반 아이도 그러한 결정에 동의해 주었다. 물론 모든 사례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때로 인생살이에서 확인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고 믿는다. 확인을 통해 과학적 진리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반면에 인간적 진리를 놓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성장하면서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구, 형제, 친구들의 너그러운 ‘눈감아 주기’를 통해 암묵적 용서를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그 침묵의 허용이 주는 마음의 평화에 안도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때의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확실한 도둑 하나를 잡아 아이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지만, 한 아이가 내적 갈등 속에서 자발적인 양심을 깨우칠 수 있도록 좋은 기회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고 혼자 위로해 본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정확한 일처리였는지 확신이 없다. 단지 그 아이가 정말 신발을 훔쳐간 아이였다면, 그 아이도 그 일련의 위기감과 안도감 속에서 뭔가 배우는 게 있었으리라고 위안을 삼을 뿐이다.

문득 정호승의 시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가 생각난다.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은/강아지도 한 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나는 한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진실로 사랑하기를 원한다면/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윤동주 시인은 늘 내게 말씀하시는데/나는 밥만 많이 먹고 강아지도 용서하지 못하면서/어떻게 인생의 순례자가 될 수 있을까/강아지는 이미 의자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오늘도 강아지가 먼저 나를 용서할까봐 두려워라

 

 

 

 

박기웅
‧서영여고 교사
‧번역가
‧전 군산서해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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