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의 주역 태인출신 녹도만호 송여종
경북 예천 박갑곤씨, 송장군 재조명 필요 주장

▲ 한산도 제승당에 있는 노량해전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일(4월 28일)을 맞아 임진왜란 당시 함께 전투에 참여해 승전한 정읍출신 녹도만호 송여종 장군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다”

이같은 주장을 제기한 사람은 정읍사람도, 충청도 사람도 아닌 경상북도 예천에서 이순신 장군을 연구하고 있다는 박갑곤씨.

박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순신 장군이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곁에서 싸움을 함께 도운 장군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면서 “특히, 녹도만호 송여종 같은 장군을 고향 정읍에서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방치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지난 19일 온양관광호텔에서 이순신 장군 관련 학술대회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힌 박씨는 “문중이나 지역사회 등에서 이처럼 훌륭한 장군에 대한 재평가를 실시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치단체까지도 이를 외면하고 있다. 지역언론에서라도 이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녹도만호 송여종 장군은 어떤 사람일까.

녹도만호 송여종 장군에 대한 기록은 ‘정읍시사(井邑市史)’나 태인면에서 발행한 ‘태인지’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품계와 현재의 계급을 비교해보면 병조참판(종2품)은 현대의 중장급, 수군절도사(정3품)는 현대의 소장급, 녹도만호(종4품)는 현대의 대령 또는 중령급이다.

따라서 녹도만호 송여종 장군은 연대급 규모를 장군으로 보인다.

전북과학대학교 유종국교수는 ‘정읍사(井邑史)에서 송여종 장군을 노량해전의 주역이라고 평가했다.

송여종(宋汝悰)은 1553년(명종 8) 당시 태인에서 태어났다. 자는 언온(彦蘊)이다. 본관은 여산(廬山)이다. 대사성 송인(宋璘)의 후손이다. 이조판서 송세형(宋世珩)의 손자이며, 찰방 송창(宋昌) 의 아들이다. 여러 차례 향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줄곧 대과시험을 준비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있었다.

때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읍 고부 출신 낙안군수 신호(申浩)의 막하에 들어가 종군하였다. 신호와 함께 이순신 장군을 따라 한산대첩에 참전했다. 그가 이순신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이순신 장군이 임금께 올리는 장계(狀啓)를 몸에 지니고 주야로 행재소로 달려가 왕에게 바쳤다. 왕은 그에게 술을 내리고 남평현감(南平縣監)에 제수했다.

녹도만호에 임명된 그는 1597년(선조 30)에 조선 수군이 원균(元均)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전투에 참여하여 왜적에게 전멸했다. 이 때 그가 이끌던 함선만 홀로 온전했다.

그후 이순신 장군이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어 수군을 영솔하였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병선 6척을 이끌게 하였다. 그는 돛을 올리고 곧바로 진격하여 왜적을 무수히 죽이니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그를 포상할 것을 주청하였다. 명나라 장수 또한 그의 공을 높이 사서 은(銀)과 포(布)를 상으로 주었다. 그는 노량대첩에서 60여 차례 왜적과 접전하여 연전연승했다.   

1599년(선조32)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으며, 사후에는 증직으로 한성좌윤(漢城左尹)이 내려졌다. 당초 산외면 상두산에 있던 것으로 알려진 그의 묘지는 김제 금산 선영에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저작권자 © 정읍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