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봄, 우리는 뛰고 또 뛰었다. 뛰다가 걸었다. 걷다가 앉았고 앉았다가 뛰었다. 그게 이제 갓 입학한 대학생활의 전부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데모라고 불렀다.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우리들에게 데모의 명분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를 군사독재의 암묵적인 어둠 속에서 지내야 했던 우리는 본능적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너무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으므로 특별한 용기도 필요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국 모든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대학교문은 굳게 닫혔다. 그리고 그해 가을 부마항쟁이 있었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반대한 민주화운동이었다. 그 사건에 이어 10월 26일, 부마사태의 수습책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권총으로 살해하여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는다. 
그리고 시해사건에 이어 일어난 12.12사태. 이는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이다. 신군부 세력은 대통령이 시해되는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를 틈타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연행하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하여 사후승인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듬해 그러니까 1980년 봄, 10ㆍ26사건을 계기로 전국에서는 유신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사회를 이룩하려는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를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길지 않았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단행되고, 무차별적으로 광주시민들을 학살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면서 ‘봄’은 허무하게 스러져갔다. 이 모든 것이 1979년과 80년 이태에 걸쳐 벌어진 사건들이다.
그리고 1987년, 제5공화국이 끝나갈 무렵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로 인해 정국은 다시 어지러워졌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뜻을 무시하고 5공화국 헌법으로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에 통일민주당과 재야세력들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고 본격적으로 반대 투쟁에 돌입했다. 이른바 6월 항쟁이었다.
그때 나는 하필 신학대학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휴교령으로 인해 1979년과 80년 2년 동안 거의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나는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나는 매일 같이 을지로와 종로의 골목을 뛰어다녔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 구호를 외쳤다. 소공동의 한 호텔 옆 골목에 있다가 경찰이 던진 사과탄에 종아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끝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또다시 거리를 뛰어다니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사건이 터지고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죽는 사건마저 벌어졌다. 전국은 들끓었다. 화염병으로 파출소들이 불타고 관공서들도 공격을 받았다. 매일 오후 5시가 돠면 경적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최루탄에 맞아 죽은 이한열의 장례식은 장대했다. 나는 수업을 빠지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혼자였다. 연세대학교에서 시청 광장까지 도무지 어디가 사람이고 어디가 도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언론은 1백 만 명이 모였다고 보도했다. 시청역에서 노제를 지낸 뒤 시위대는 청와대로 가겠다며 광화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채 광화문 사거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가스차의 이마가 불꽃을 튀기며 최루탄을 쏘아대기 시작했고 총류탄과 사과탄도 어지럽게 공중을 날아다녔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나도 옆 골목으로 재빨리 도망쳤다. 제 자리에 있다간 군중에 깔려 죽거나 다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돌아온 광화문대로에는 두 개의 무덤이 생겨나 있었다. 큰 무덤은 시위자들이 정신없이 피하느라 남겨진 신발들이었고 작은 무덤은 안경들이었다. 이는 80년 오월의 어느 시위에서 보았던 장면과 정확히 일치되는 장면이었다. 이는 우리의 도망이 얼마나 혼을 빼놓는 것이었는지를 잘 반증해준다.
전국적으로 백만을 웃도는 사람들이 토요일마다 촛불시위를 하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하고 있다. 내 생애 이한열 장례식 때와 같은 큰 무더기의 사람들을 다시 보리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박근혜-최순실게이트 사건을 제도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백 번 맞는 말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권력이 곧 부패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른바 정경유착이 있었고 권언유착도 있었다. 불평등과 반칙, 특권, 공적 권한의 사유화 등이 심각한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나는 중학교 때 선도부원이 된 후, 교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저학년 아이의 팝송책을 뺏고 마음을 졸였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는 실장이라는 권한을 남용하여 친구들의 엉덩이를 때리기까지 했다. 나는 이 사건들을 기억할 때마다 인간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그 누구라도 그것을 행사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하곤 한다. 심지어는 주변의 권력을 이용해  이득을 얻고자 하는 간사함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를 제어할 제도가 꼭 필요하고 법집행도 명확해야 한다. 행정부나 검찰, 언론, 기업 등 이른바 기득권 세력들이 서로를 도와가면서 나라를 망치는 일이 없도록 시민들의 감시가 태만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제 내 생애에서는 부정부패에 대한 항거의 이유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다양한 제도의 정비와 함께 반드시 나에 대한 성찰 또한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는 작은 권력으로 얼마나 큰 갑질을 하며 인생을 살아왔던가.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정도를 찾기보다는 주변의 권력을 찾아 편법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우리의 촛불은 그러한 자성의 의미도 강력하게 포함하고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촛불은 내 얼굴을 가장 먼저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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