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곡 선생의 이타적(利他的) 공생활(公生活)

##편집자 주##

 본 기고는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제주도와 군산,여수해운행만청장을 지낸 고재웅씨(인물사진)가 청렴 공무원의 표상인 춘곡 채동현 선생의 발자취를 2회에 걸쳐 요약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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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곡 채동현(1913~1981) 선생은 부안군 주산면 동정리에서 태어나 주산국민학교(당시 4년제)와 정읍 고부국민학교(6년제)를 거쳐 정읍 농림학교(현재 정읍농고)를 졸업한 후 곧바로 정읍군 영원면 풍월리 일대의 광활한 농지의 농감(農監)으로 생애 첫 공생활(公生活) 을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부득이 직장에서 가까운 풍월리로 이거(移居 : 1936년)하신 공(公)은 이 곳에서 한 평생 지역사회 발전에 헌신 하면서 강직하고 청렴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원래 영원면 풍월리 일대의 넓디넓은 벌판은 만조 때는 바닷물이 밀려들고 여름 홍수철에는 섬진강 상류 유역의 물결이 덮쳐오는 쓸모없는 뻘밭으로 갈대만이 무성하게 숲을 이루었던 황무지나 진배없는 곳이었다.
 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에 걸쳐 토지조사 사업을 빙자하여, 조선 국토의 40%에 육박하는 면적을 병탄(倂呑)했다. 영원면 풍월리 일대의 농지도 대부분 일본인 소유로 귀속되었으며 미개발된 지역도 일본인의 자금과 주민들의 땅 띄기 노동력으로 개간되어 갈수록 일제 소유의 토지 면적은 확대되어 갔다.
 풍월리 지역은 크게 ‘다목농장(多木農場)’과 ‘불이농장(不二農場)’으로 구획되었는데 다목농장(속칭 : 다막촌)은 개간 총책임자인 일본인 다막이의 이름을 빌려 다목촌(多木村)이라 했고, 불이농장은 이름 그대로 한국과 일본은 둘이 아닌 하나의 몸통(內鮮一體)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불이농장이라 했으니 일본인의 간교한 식민지 유화정책이 아닐 수 없다.
 이 지역은 당초 개간할 당시 4개 구역으로 나뉘어 구획정리 되었는데 춘곡이 터를 잡은 월산(月山)부락은 3구역에 소속되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고유 행정동 명칭인 「월산」보다도 대체적으로 삼구(三區)로 불리곤 했다.
 일본인 다막이의 관할에 소속된 풍월리 주민들도 대부분 소작인으로 전락하여 경제적으로 곤궁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다.
 춘곡은 이 일대의 농감으로 종사하면서도 민족의식과 정의감이 투철하여 항상 소작인의 입장에서 일처리를 하였고 가급적 소작료를 경감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같은 공(公)의 타고난 후덕한 성품과 온후한 몸가짐은 자연히 지역민의 두터운 신망을 받게 되었다.
 이후 8.15 조국 광복과 6.25 한국전쟁의 격변기 속에서도 지역주민의 절대적 지지와 천거로 민선 영원 면장(11대, 1952. 5. 6.~1953. 9. 16.), 영원면 초대 의회 의장, 동진 수리조합 평의원(조합이사격), 농협 영원면 초대 단위조합장, 정읍군 농협 수석이사 겸 정읍군 농협 조합장 직대(1968~1970), 고부향교 전교(典校 11대, 1975. 1~1978. 12) 등을 역임하신다.
채공(蔡公)은 본디 품성이 지극히 겸손하여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공적활동에 드러내는 자체를 한사코 사양하는 성격이었다. 따라서 주변의 적극적 권유와 협조로 어쩔 수 없이 몇몇 공직을 맡았지만 결코 하찮은 공명심으로 그러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니다.

▷농촌 새마을 운동 사업의 숨은 선구자 

 일제가 관활하던 정읍군 영원면 풍월리 일대의 다목 농장과 불이농장은 8.15 광복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귀속재산으로 전환되고 1950년 초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농지개혁 시책에 따라 귀속농지와 3ha(정보) 이상 소유의 일반 농지도 대부분 유상몰수 후 현지 농민들에게 유상 분배되었다. 이 시책에 따라 풍월리 지역 소작인들도 비로소 자영농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곳은 19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여름 장마철이면 엄청난 빗물이 들판으로 범람하여 하천에 놓인 통나무 다리가 자주 유실되어 주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힘든 역경 속에서 농사를 짓고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농로를 개설하고 곳곳에 튼튼한 하천 교각을 구축하는 것이 지역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일제 강점기 말기와 8.15 광복, 그리고 6.25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변기였기 때문에 국가재정은 극도로 빈약하고 행정질서도 혼란스러워 관계 당국의 적극적 도움을 기대할 수조차 없는 처지였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공(公)은 동진 수리조합(토지개량조합)과 정읍군 당국의 재정적 지원을 이끌어내 풍월교(豊月橋) 구축과 후지리-연지리간 도로 확장사업 및 수다한 농로 개․보수 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고, 풍월리 농협 공판장 개설, 연지동 농협창고 신축, 농협 영원면 단위조합 창설 및 영원 초등학교 증축사업 등을 위해서도 동분서주하며 심혈을 기울이셨다.
특히 영원면 풍월리 일대 국민학교 취학 아동들이 다니는 면 소재지인 은선리에 위치
한 영원초등학교 까지는 통학거리가 무려 5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 장마철이나 눈보라 치는 겨울철에는 도보에 의한 통학이 아주 불편했다. 
 평소 이를 몹시 안타까워하던 춘곡은 동네 인근에 국민학교를 설립하고자 불철주야 노력한 끝에 드디어 1957년도에 감격스러운 신풍국민학교 개교에 성공한다.(현재 이 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2000년도에 폐교되고 민간인에 불하된 후 사설 요양원과 한국 귀농귀촌학교로 전환되어 운영되다가 입소자 절대 부족으로 휴면상태다)

-사진은 춘곡 선생이 세운 영원면 풍월리 풍월교와 주변 농촌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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