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본 기고는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제주도와 군산,여수해운행만청장을 지낸 고재웅씨(인물사진)가 청렴 공무원의 표상인 춘곡 채동현 선생의 발자취를 2회에 걸쳐 요약 게재한다. 

-영원면 풍월리 소재 공로비(1969년 6월 제막

 이에 지역주민들이 공(公)의 깊은 은덕에 감읍한 나머지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갹출하여 영원면 연지마을 신풍국민학교 옆(신풍국민학교 개교 공로 : 1958. 5월 제막)과 풍월리 농협 공판장 인접한 곳(풍월교 가설 공로 : 1969. 6월 제막)에 각각 「춘곡 채동현 공로비(「春谷 蔡東玄 功勞碑)」를 세우기에 이른다.
 1969년 6월 풍월리 유지 일동 명의로 세운 공로비문 말미에 정형모 선생께서 찬(撰)한 헌시(獻詩)는 공(公)에 대해 지역 주민들이 정성을 다하여 감사해 하는 마음을 지금까지도 오롯이 전하고 있는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春谷에 볕이 들기 어제련 듯 十年이라. 
 난초 모란꽃이 서로 얼려 향기롭다. 
 아름 담뿍 안아다 고운님께 바치리”

 이와 같은 공(公)의 일련의 개척자적 희생정신은 정부로부터 높게 평가받아 내무부장관과 농림부장관의 표창장을 각각 수상하였으며 그 외 다수의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젊은 청년시절부터 농촌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하여 온 공(公)은, 1961년 5.16 박정희 군사정부에서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전개해 왔던 「농촌 새마을 운동 사업」보다 앞선 참된 기수이자 숨은 선구자라 하겠다.

-춘곡 선생의 음덕 

 평소 이웃에게 선을 쌓고 덕을 베푸는 가문은 비교적 오랫동안 번성하고 뒤끝이 좋기 때문에 적선(積善)과 적덕(積德)은 인간관계의 필요적 덕목으로 권장되고 있다. 그래서 “좋은 일을 많이 한 가문은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뒤따른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했다. 
 인간은 돈과 권력에 대한 끝없는 탐욕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보통인지라. 스스로 욕심을 자제하면서 산다는 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찰력이 없이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넓은 들판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풍월리 춘곡의 집은 지나가는 길손들의 허물없는 쉼터이기도 했다.
 정읍군청이나 영원면사무소 공무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동진 수리조합 직원과 경찰지서 순경까지도 공무수행 차 인근을 지나다 때가되면 스스럼없이 이 집에 들러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뿐만 아니라 동네를 지나는 과객들이 수시로 사랑채에 들러 환담을 하거나 바둑을 두는 등 마음 편히 잠시 머물다 가곤 하였다.
 공(公)은 자기 자신과 자식들에게는 가을 서릿발처럼 엄격하게 자제하면서도 남을 대할 때는 보드라운 봄바람 같은 외유내강 형의 성격을 지녀 주변에 항상 가까이 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이 같은 살아생전의 몸가짐은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어 5남 3녀, 자부, 사위, 손자녀, 손부 등 모두(53명)가 선친(선고조)의 명예를 조금도 흠내지 아니하고 사회 각 분야에서 고위 공직이나 고교 교장, 중견기업 임원(2명), 외항선 선장(1급 항해사, 갑장), 대학교수(미국 유타대 박사) 및 부동산 대표 등으로 나름대로 바르고 안정된 생활 자세를 견지해 오고 있다.
 더욱이 손자녀대에서도 병원장, 고위공직자(2명), 행정고시 합격(2명), 변리사, 변호사, 박사학위(3명) 등이 배출되었고, 벤처사업과 자영업 등 각 부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다. 아마 한미한 시골 한울안에서 이처럼 돋보이는 자손들을 두게된 것은 춘곡선생의 음덕의 결과라고 본다.
“黃金 萬兩 不如 一敎子(황금 만냥 불여 일교자)”라 했다. 
 이는 자식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한 자식 잘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는 격언이다. 비록 자식들에게 별다른 재산은 물려주지 못했지만 농촌살림의 어려움 속에서도 자식들 교육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돈이 아닌 지혜를 물려주라는 옛 선인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한 결과라고 본다.

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se Oblige) 정신 구현

 정읍군 농협 조합장(직대) 시절인 1970년 2월 풍월리 농협 창고 마당에 야적(당시는 양곡 보관 창고가 절대 부족한 실정이었음)해 놓은 정부 추곡 매입 벼 3천여 가마가 동네 철부지 어린학생(신풍국민학교 4학년생) 들의 한줌 볏짚 모닥불로 인해 삽시간에 전소된 대형 화재사고가 발생했다. 학생들이 하교 길에 하필 야적장 곁에서 볏짚 불을 피워 추위에 언 손발을 녹이다가 불꽃이 거센 바람결에 날려 순간 벼 야적장에 인화되어 일어난 사고다.
 이에 관계 당국에서는 발화 책임이 있는 학생들의 부모에게 손해배생 책임을 물으려 했으나, 공(公)은 농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고 있던 터라 한사코 구상권 행사를 마다한 채 자신이 소유하던 모든 농지를 헐값에 처분해 마련한 자금으로 전액 변상하여 당국은 물론 인근 지역 주민들을 크게 감동케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누적된 과로로 돌연 병이 깊어 1981년 69세를 일기로 아쉽게 삶을 마감하신다.
 한평생 지역주민의 편의와 지역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온갖 시련과 간난(艱難)을 무릅쓰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희생정신을 발휘해 오신 공(公)은 가진 것 모두를 마지막까지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영원면 은선리 소재 공적비(1982년 5월 23일 제막)-

 공(公)이 타계하시자 얼마 후(1982년 5월 23일) 고부향교 유림회와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전계봉, 김광수, 진의종(훗날 국무총리 역임), 정읍군수 임정호, 정읍군 농협조합장 이윤형 등 수많은 지역 유력인사 들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公)의 업적을 기리기로 뜻을 모아 ‘춘곡 채동현 공적비(春谷 蔡東玄 功績碑)’를 영원면사무소 앞 제비공원에 성대하게 제막했다.     
 이 공적비는 항일 독립투사인 백정기 열사 충혼비 옆에 나란히 건립되어 있는 바, 두 분 다 이 고장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영구히 기리고자 한 뜻이리라. 
 실로, 한 인간의 살아생전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면단위 관할지역내 3개 장소에 주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2개의 공로비(1958. 5월 신풍국민학교 개교 공로비 제막, 1969. 6월 풍월교 가설 공로비 제막)와 1개의 공적비(1982. 5월 지역발전 공적비 제막)를 세우게 된 것은 평소 채공(蔡公)에 대한 추모의 정과 깊은 존경심의 발로(發露)라고 본다. 공(公)은 지금 부안군 주산면 소산리 선영에 고이 모셔져 있다.
 세월이 갈수록 살아생전 못지않게 사후에까지도 공의 훌륭한 족적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고 새삼 흠모의 정과 존경심을 자아내게 하는 까닭은, 세속의 오욕에 물들지 않고 오직 한평생 청초하고 고매한 맑은 정신으로 덕행을 쌓고 끝내 지닌 것 모두를 내려놓은 아름다운 모습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즈(Noblesse Oblige : 높은 신분에 상응한 도덕적 책무) 정신을 몸소 실천한 춘곡 채동현 선생의 미덕을 후세인들이 어찌 본받지 않을 수 있으리요!

-사진설명// 맏사위(고재웅)가 공적비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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