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되면 아이들에게 ‘자기소개’를 시킨다. 아이들에 대해 좀 더 빨리 알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낯섦을 완화시켜보자는 의도가 크다. 이전 학년의 안온함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새로운 학년에 연착륙하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미적거리다가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자기소개를 준비시키는 그 짧은 시간에 아주 신선하고 상상력 넘치는 자기소개를 준비하는 녀석들도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자기소개를 듣다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저는 성격이 내성적이라 잘 다가가지 못해요. 그러니까 먼저 말 걸어주면 좋겠어요.’라는 말이다. 결국 새로운 아이들과의 만남이 너무 낯설고 두려우니 타인이 먼저 그 낯섦을 깨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인 셈이다. 

사실 낯섦이란 새로움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낯섦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그것을 맞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낯섦은 누구에게나 어색하고 불편하며 피하고 싶은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낯섦이 꼭 부정적인 모습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삶은 늘 낯섦을 파생시키는 역사였다. 자궁의 안온함으로부터 떠난 이후로 인생은 끊임없이 낯설음을 찾아가는 여행이었다. 인간을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던져진 존재’라고 주장했던 실존주의자들의 정의를 참고했을 때, 그렇게 이 세상에 내던져졌을 때의 낯섦은 얼마나 두려운 것이었겠는가. 그럼에도 아이들은 낯설었던 모성과 부성, 가족들에 기대어 자신의 생명을 키웠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익숙해질 때쯤 아이들은 그 익숙함에 머물지 않고 다시 다른 낯섦을 향해 떠났다. 그것은 새로운 친구일 수도 있고 새로운 취미나 기호일 수도 있으며 새로운 꿈, 가치관, 신념, 종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성장하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낯선 사람들, 낯선 환경들, 낯선 시간들, 이 모든 것과 충돌하고 극복하면서 성장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새로움과 낯섦이 두려움과 맞닿아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낯섦의 과정 없이 삶의 성숙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꼭 기억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은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라는 구절로, 낯섦이 성숙으로 이어진다는 해석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굳이 이 소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알 속의 따뜻함과 아늑함, 편안함이 좋다고 그 속에만 머물려고 하면 그 새는 영원히 저 푸른 하늘을 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비좁고 어두운 세계가 자기 삶의 전부라고 인식하면서 말이다. 
힘든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끊임없이 낯섦으로 나아가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잠자던 감각을 깨워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조금만 여유만 생기면 그렇게 열렬히 여행을 떠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행의 매력은 익숙함 속에서 편히 잠자던 다양한 감각들이 기지개를 켜며 제 할 일을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데 있지 않을까. 
낯섦은 다양한 분야에서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낯설게 하기’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러시아 형식주의가 시의 기능을 ‘사물을 낯설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데서 유래한 말로,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이다. 그는 ‘낯설게 하기’의 방식에 의해 문학적 특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쉽게 말해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그리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일상 속에서 익숙했던 것들을 생소하게 만들어 참신한 무언가를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모든 기교성(artfulness)은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며, 예술이란 그 기교성을 경험하는 방식”이라는 그의 말은 ‘낯설게 하기’의 위력을 잘 설명해 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연극에서의 소외효과(낯설게 하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현실의 친숙한 주변을 생소하게 보이도록 함으로써 극중 등장인물과 관객과의 감정적 교류를 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소외효과를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하여 ‘충격적인 것, 즉 설명이 필요하며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제시하는 수법’라고 정의했다. 낯설게 볼 줄 알 때, 충격적이고도 아름다운 세상을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익숙해지면 다른 낯섦을 찾게 되어있다. 익숙함은 우리에게 평안과 안정을 주지만 동시에 매너리즘이나 안일을 주기도 한다. 우리가 낯섦과 충돌하면서 그 두려운 매력으로부터 도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익숙함의 분비물에 젖은 날개 때문에 날렵한 비상이 어렵더라도, 저 새롭고 낯선 하늘의 유혹은 우리들의 날갯짓을 한껏 도울 것이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석 달이 지났다. 3월의 낯섦은 조금씩 낡아가고 이제 익숙함이 슬그머니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시기이다. 이제 다시 낯섦으로 떠날 때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익숙함의 벌레들은 우리의 감각과 의식들을 서서히 갉아먹게 될 것이다. 익숙함과 낯섦의 변증법적 성장은 언제나 계속되어야 한다.
또 하나의 낯섦이 다가오고 있다. 여름이다.

박기웅 본보 칼럼위원
       서영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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