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여 돌을 맞은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 하나 지정되지 못하고 10여 년 동안을 피일 차일 아까운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자니 답답하기만 하여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비록 성공은 못했지만 당시의 목숨을 걸고 봉기했던 민초들의 희생을 지금은 우리가 먹고 살만해서인지 후대 사람들이 숭고한 정신을 너무나도 그 진가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영령들을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동학란’ 하면 그 키 워드는, “전라북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분연히 일어난 농민들의 항거로 황토현 전적지에서 농민들이 대승을 거두 움으로서 농민들의 봉기에 대해 조정에서 거대하고 중대한 민란으로 규정하게 되어 고부민란으로 크게 인식되었으며, 전주입성과 더불어 우금치 전투에서 무지막지한 일본군의 총칼에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막을 내렸다.” 로 알고 있다. 꼭 황토현 뿐만 아니고 그 후로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이 고증자료에서 밝혀지기도 한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농사밖에 모르는 농민들이 막강한 권력에 조직적으로 맞섰다는 것은 그 당시를 회고해 보면,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독립운동과도 같은 맥락으로 견주어 볼 수가 있다고 본다.  비록 목적은 같은 자유 평등 박애주의였으나 봉기의 주체가 이들과 다른 점은 프랑스 대혁명은 방탕을 일삼던 루이16세의 왕정에 지식인들로부터 시작된 항거이며, 또한 미국독립운동 역시 지식인들로부터 시작됐던 항거였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의 민초들의 항거는 과거 해방이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뭉치고 행동으로 옮긴 적은 임진왜란과 일제에 대한 항거로 3.1운동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으로 대별할 수 있겠다. 
임지왜란 당시 의병을 모집하고 활동하는 것은 주로 승려나 지식인들이 앞장  섰으며, 갑오동학농민 혁명은 가장 낮은 곳의 천민인 농민들이 참다 참다 못해 일어선 것이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그 민주화 정신의 끓는 피는 계속 이어져 25년 뒤 1919년 3.1운동이 종교계와 지식인들의 피를 끓게 만들었고, 그 뒤10년 뒤 1929년 11월 다시 광주 학생들까지도 민주화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본다.
이래서 동학농민혁명은 재평가되고 근대의 민주화 발판이 되었음을 재조명하여 헌법 전문에도 3.1운동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어야 하는 것으로 후손들이 당시의 영령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우매한 농민들도 자신들의 의사표출로 민족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심어준 자유 평등 박애주의의 정신이 자리 잡게 해 준 역사적인 운동인데도 ‘고부민란’ 또는 ‘동학란’으로 역사 속에 묻혀버릴 뻔 한  사실을 혁명으로 바로잡은 어느 향토사학자의 사명감과 열정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당시의 이름 없는 영혼들은 영원히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그 후손들은 조상들의 거룩한 정신마저 묻히고 ‘역적의 후손’으로 멍애를 짊어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 동안 지식인들이나 역사학자들은 조정에 반역을 한 사람들의 누명을 거론한다는 자체가 두려워 눈치를 보며 귀와 입을 다문 체 과거를 외면했지 않았나 생각하니 당시의 농민들 보다 못한 비굴한 지식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 향토사학자는 오직 농민이 이루다 만 민주화 혁명 이였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일본의 대학도서관에서 자료를 수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누구의 경제적인 도움도 없이 당시 상황의 자료 수집과 현장 방문으로 생생한 증언과 사실을 줄곧 밝혀 1970년대부터 줄기차게 갑오동학혁명이라 부르짖었다.
드디어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만들어지면서 국가기념일 제정의 필요성이 본격화 되였다고 본다. 
그러나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역사와 많은 군중이 참여하여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조직적으로 대오를 갖추게 되어 조정에서도 놀란 진정한 농민혁명이 출발했던 전적지의 과거를 제쳐두고 오직 지역이기주의에 함몰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었던 ‘피노리’에 표지판을 세우려다 주민들의 ‘배신의 마을, ‘배신의 주민’이라는 흔적을 감추려 결사반대하였던 것이나, 기념일을 포고문을 발표한 무장기포일로 하자는 것도 모두가 농민혁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향심이 투철한 주인의식이라 생각하면 아주 훌륭한 현상이라 할 수도 있어 탓하고 싶지는 않다.
지역에서 기념식이나 하고 지역 행사로만 끝내서야 되겠는가? 
전라북도 행사도 빛이 나지 않는데 전국적인 기념일이 되겠는가?
세계적인 프랑스 혁명처럼 우리도 민초들이 농민 혁명을 일으켰다는 세계 최초의 농민 혁명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기념 일자 하나에 목멘다면 이것은 분명 소탐대실(小貪大失)로 훗날 그 책임은 면할 길이 없으리라 믿는다.
지역 행사에 안주하지 말고 3.1절처럼 국가 행사로 발전시킨다면 예산 확보가 쉬어져 보다 많은 연구가 이루어 질 것이라 생각된다.  3.1운동행사와 기념식이 전국 지역별로 계승발전 시켜나가고 있는 것처럼 각종 행사가 세분화되어 전국 지역별로 특색 있는 문화가 형성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몇 사람의 노력으로만은 어려운 것이므로 기념일 제정의 테이블에 앉아있는 그런 분들이 하루빨리 눈을 크게 뜨고 연구에 앞장서야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남아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농민혁명의 꽃을 피우는 일이며 처음 시작한 향토 사학자의 참 뜻을 이어가는 길이라 생각된다. 
또한 기념일은 뜻을 같이하는 지역주민들의 동참하는 호응도가 중요한 요인이라고 본다. 
50여 년간을 농민혁명 정신을 기리고 자체 지역 문화제로 이어온 주민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동학혁명이 있는 것이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들이미는 일> 과 <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몇몇 학자나 관리자들만의 기념일은 과거 기념일을  훌륭하게 이어 온 본질을 오래가지 않아 변질될 우려가 높다고 본다.
3.1절 행사는 천안시의 현지인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행사를 추진하여 왔었기에 오늘의 3.1정신을 이어왔었던 것이라 본다. 충청남도 도청소재지에서 행사를 하지 않고 오직 많은 지원만 있을 뿐이다. 도청소재지에 기념관이나 공원도 없다. 그래서 지금도 3.1절 행사는 전국적으로 그날의 만세소리를 재현하는 것이다. 
보통 관리의 주체 자들은 오직 정부의 인사명령에 의한 관리자들이기에 지속성이 우려되고 현지인들 보다는 사명감과 선열들의 정신이 변질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우를 갖게 되어, 천안 시민들의 3.1운동과 같은 바탕의 본질이 진정한 기념일인 것이라 생각되어 기념일 제정에 참고가 되었으면 해서 이렇게 제언하는 것이므로 심사숙고 해주었으면 한다.

최 창 용 
중소기업 기술지도사 
정읍중학교 10회,  호남고등학교 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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