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은 파리의 상징이자 프랑스의 상징이다.
 한 해 700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명소인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세계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1889년 프랑스 파리에 세워졌다. 높이가 무려 300m에 이른다. 설계자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이름을 따 에펠탑이라 명명했다. 1930년 미국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지 부동의 세계 최고 높이의 철 구조물로서 위용을 떨쳤다.
 그러나 당대에는 중후한 석조건축의 풍미에 익숙하고 생소한 철 구조물에 이질감을 느낀 많은 파리 시민들로부터 ‘추악한 철덩어리’, ‘철골 괴물’이란 비아냥과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도시미학적인 측면에서는 예술계와 문학계 명망가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여자의 일생, 비곗덩어리, 벨아미 등 대표작을 남긴 소설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에펠탑이 보기 싫어 집의 창문을 에펠탑 반대쪽에 내고, 에펠탑 안의 식당에서 식사하는 이유를 ‘파리에서 그 빌어먹을 것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이 그 안에 있는 식당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는 일화는 당시 에펠탑에 대한 사회상을 전하고 있다.
 당초 에펠탑은 20년간 전시할 계획으로 세워져 20년이 되던 해인 1909년 해체될 위기를 맞았으나 라디오 송신탑 기능이 인정되어 존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토목공학적 일대 혁명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패리스호텔에 복제한 에펠탑이 있다. 에펠탑을 보기 위해서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달려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에펠탑이 한 도시의 상징이자 한 나라의 상징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반대와 시련이 뒤따랐다. 당시 흉물스러워하던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했던 철 구조물 에펠탑이 지금은 세계 제일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동안 방문객이 3억 명을 돌파했고 90%가 외국관광객이다. 또한 에펠탑은 다양한 상품으로 개발되어 천문학적인 경제사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창조적인 발상과 신기술의 조합은 세계적인 명물을 탄생시켰다. 생소함과 이질감을 외면하고 익숙함에 편승한 선택을 했더라면 에펠탑은 영원히 지구상에 존재할 수도 없고 도시의 상징이나 나라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랜드마크는 한 도시의 가치창출을 위해서 독특한 디자인과 다양한 용도로 개발된다. 세계의 수많은 도시상징물이 있지만 막상 그 도시를 떠올리는 상징물은 손꼽을 정도이다.
 선택은 순간이겠지만 결과는 천차만별인 것이다. 
 천년의 도시가 이유없이 존재하거나 영속되지 않는다. 선택은 나머지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 도시든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도시가 흥하고 망하느냐가 판가름 난다. 인간을 복제하면 사람이 멸하고 문물을 복제하는 도시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창조적인 발상의 선택은 밀레니엄의 새 시대를 열 수 있고 그 원천은 생소함과 이질감에 있다. 시공을 초월한 에펠탑의 등장은 인류에게 창조적인 영감과 신문화를 선물했다. 
 누구에게나 선택의 순간은 마주치게 된다. 어떤 선택이든 그 선택이 에펠탑의 현명한 선택이 되길 바란다.(자연삶연구소 오 종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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