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인문학 동인회원 심민섭)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에 있는 무성서원이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무성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서원 9개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 등재가 최종 결정되었다.
정읍의 무성서원과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을 제외하면 6개의 서원이 경상도에 집중되어 있고 전북에서는 유일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는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따라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계유산 필수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유학교육을 위해 설립된 관학 교육기관인 향교와 구별되는 서원은 향약, 유향소와 함께 설립된 특수 사립 교육기관이다. 
무성서원은 신라 정강왕 1년(886년) 고운 최치원 선생이 태산 태수로 부임하여 8년간 선정을 베풀고 많은 치적을 남긴 후 협주군수로 전임하게 되자, 주민들이 生祠堂을 짓고 泰山祠라 하였다. 
원래에는 월정대에 있었는데 1483년 정극인 선생이 창설한 향학당이 있는 자리인 현 무성서원 자리로 옮겼다가 1484년(조선성종 15년) 훼손된 태산사를 다시 세웠다.그 후 1544년 태인 현감으로 부임한 신잠 선생이 6년여에 걸쳐 선정을 베풀고 강원도 간성 군수로 전임되어 떠나자, 또 주민들이 생사당을 세워 배향하다가 고운 최치원 선생의 태산사와 合祀하였다.
불우헌 정극인 선생이(1401~1481) 1437년 세조에 의해 단종의 왕위가 찬탈되자  학당을 세워 제자들을 교육시키니 선현향사와 후진 교육이라는 서원의 구실을 다하게 되었다.
정극인 선생에 이어 송세림 선생이 책임을 다하였고 정언충 선생, 김약묵 선생, 김관 선생 등의 인물을 배출시켰으며, 1615년 이 고을 유림들이 태산사와 생사당을 서원으로 바꾸어 세우고 1696년(숙종22년) 청액상소로 무성·태산·남천 3가지 서원 이름을 올렸는데 武城書院으로 사액하고 復户 3결, 院生 30명, 保奴 30명이 허락되어 그해 11월 23일 사액사 예조좌랑 柳格을 맞이하는 영빈례가 베풀어지고 제가 올려 짐으로써 무성서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 후 무성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전국적인 서원 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전북 유일의 서원이며,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신분 계급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학문의 기회를 동등하게 제공하였고, 향민 결집의 중심지였으며 지역문화를 선도하고 지식인들이 사회적 역할을 다하는 거점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1968년 12월 19일 국가문화재 사적 166호로 지정된 무성서원은 배향 인물로 고운 최치원(崔致遠), 영천 신잠(申潛), 불우헌 정극인(丁克仁), 눌암 송세림(宋世琳), 묵재 정언충(鄭彦忠), 성재 김약묵(金若默), 명천 김관(金灌) 선생 7인을 배향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絃歌樓(3칸 2층), 강당인 明倫堂(5칸), 講修齋(4칸), 내삼문과 사우인 泰山祠(3칸), 고직사(3칸), 그리고 주변에 비각이 있으며 특히 무성서원에는 1486년 이후의 奉審案, 講案, 尋院錄, 院規 등의 귀중한 서원 연구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원규에 따르면 학습순서는 격몽요결과 소학부터 시작하여 大學,詩經, 周易, 禮記, 春秋 순으로 되어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무성서원은 먼저 홍살문을 들어서면 외삼문 대신 문루인 絃歌樓가 있다.
1891년에 세워진 현가루는 논어의 양화편에 나오는 “공자께서 무성에 가셔서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셨다(子之武城 聞絃歌之聲)”라는 구절에서 취해 썼으며, 중국 무성현에도 무성서원이 있어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遊)가 무성현감으로 부임하자 공자가 제자들과 격려차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무성서원의 현가루 2층 다락에 올라서서 서원의 안쪽을 바라보면 강당인 명륜당이 바로 눈에 잡힌다. 
「武城書院」이라는 사액현판이 걸려있으며 정면 5칸·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3칸 대청은 앞뒤가 트여있고 좌우 양쪽에 협실이 있는데, 강당 향학 공간은 1475년 정극인 선생의 향약 창설 시 세워진 향학당에서 유래되었다. 1615년 태산서원 창건 시 강당 역할을 한 庠舍가 있었으나 1825년 화재로 소실되고 1828년 현감 서효순이 중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내삼문과 사우인 태산사가 중심축 선상에 놓여있고 강당 가운데 대청의 트인 공간으로 내삼문의 태극문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태산사 안에는 조선말 어진 화가로 유명한 채용신(신태인읍 육리에 30여년간 살았던 생가가 있음)이 그린 고운 최치원 선생의 영정이 있었는데 미술품 도난 사고에 대비해 도립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대신 모사품을 모시고 있고 내삼문 양 기둥에는 「聖朝額恩(성조액은) 士林首善(사림수선)」이라는 주련이 걸려 있다.
최치원 선생의 영정은 1783년 하동 쌍계사에 봉안된 선생의 영정을 무성서원에 이안해야 한다는 낙안·흥양 향교의 통문에 따라 1784년 무성서원에 봉안하고, 1831년 채용신이 다시 그렸으며 1834년에는 관찰사에게 청원하여 최치원 선생의 「계원필경」을 간행하여 비치하였다
담장 밖으로는 동쪽에 원생들의 기숙사인 강수재가 정면 4칸·측면 3칸의 건물로  비치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서원에는 기숙사로 동·서 양재가 있으나 무성서원은   동재만 남아있어(서재로 흥학재가 있었음) 다른 서원과 구별   되고 1696년 사액 후 고사를 강수재로 변경하였다가 1887년   강수재를 새로 세우고 몇 번의 수리를 거쳐 현재의 건물로    보존되고 있다.강당인 명륜당 6개의 기둥에는 揖讓進退(읍양진퇴) 杏壇遺敎(행단유교), 月朔參拜(월삭참배) 享禮倆丁(향례양정) 春秋講磨(춘추강마) 經義四子(경의사자), 文藝時習(문예시습) 詩書藝樂(시서예악) 德業日新(덕업일신) 孝悌忠和(효제충화), 勸規交烅(권규교휼) 藍田故約(람전고약) 6줄의 주련이 있고,강수재의 4개 기둥에 淵源追潮(연원추조) 洙泗濂閩(수사염민), 依仁遊藝(의인유예) 德業日新(덕업일신) 規模已宏(규모이굉) 心身家國(심신가국), 愼思篤行(신사독행) 倫理自明(윤리자명) 4줄의 주련이 걸려있으며, 강수재 앞에는 호남 최초로 항일의병을 일으킨 병오창의기적비가 있다.
병오창의란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의 이듬해인 병오년(1906) 6월 3일에 면암 최익현, 돈헌 임병창, 춘우정 김영상 선생 등 800여명이 집결하여 거의하였으며 의병활동에서 독립군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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