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피그 데이(Pig Day)

   서울에서 1남1녀의 가장으로 사는 정해 씨의 어머니가 작년에 돌아가셨다. 제사는 형님 댁에서 모시니까, 그가 어머니 생신날, 앞으로 매년 생신 일을 기념하기 위해 이 날을 피그 데이로 명명하고, 돼지머리와 족발 등을 준비하여 저녁상을 차려 놓고 자녀들에게 피그 데이로 정한 사연을 이야기 했다.        
  그의 어머니 전 남순 씨는 녹두장군의 출생지인 고창읍 당촌 마을에서 태어나, 19살에 정읍사 여인이 살았었다는 전설이 있는 신정동 샘바다 마을로 시집왔다. 결혼 다음 해, 즉 해방 되던 해인 1945년에 첫아들을 낳았고, 2년 후에 둘째인 정해를, 또 2년 후 셋째를 낳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고, 고단한 삶은 6·25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전쟁이 시작되고 곧바로 공산군이 부산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점령했고, 샘바다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장산 망해봉에서 바라다 보이는 용산호 바로 밑에 있는 이 마을은 한 때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내장산·입암산을 은거지로 저항하는 빨치산들이 야간에 내려와 식량을 약탈해 가곤 했었다. 마침내 1953년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그 해 말에 그의 아버지가 동네사람 10여명과 함께 정읍경찰서에 불려가 공산군에 부역(附逆)했다는 죄목으로 집단사살을 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그 다음 해에 셋째아들까지 원인 모를 병으로 잃게 되었다.  
  29살에 청춘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는 9살, 7살 된 아들 둘을 데리고 팍팍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당시 논 3 마지기와 밭 2 마지기, 두 칸짜리 초가집이 전 재산이었으며, 이 같은 전답으로 살아가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참으로 억척스럽게 일하며 살았다. 논밭 일은 당연히 혼자 했고, 짬이 나는 대로 남의 집 품삯 일을 했으며, 일이 없으면 산에 가서 갈퀴나무를 해서 머리에 이고, 이 십리가 넘는 정읍 시장에 가서 팔기도 했다. 
두 아들이 초등학교를 마칠 때 까지만 해도 겨우 굶지는 않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는 것은 그 당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절에는 양부모가 있는 집에서도 자식들을 중학교에 진학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매월 내야하는 월사금 등을 마련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든 큰 아들을 중학교에 보냈고, 중학교만 졸업시켜 부산 어느 공장에 취직을 시켰다. 그리고 두 살 아래인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시키고, 형이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1년 꿇게 한 후에 중학교에 보냈다. 그를 중학교에 입학은 시켰지만 어려운 형편에 월사금과 책값 등을 마련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돼지를 키우기로 했다.   “돼지새끼를 사다가 키워서 팔면 학교 월사금과 책값에 보탬이 되겠지.” 그러고서 측간 옆에 돼지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정읍 가축시장에 가서 새끼돼지를 사다 키웠다. 돼지 키우기의 가장 큰 애로는 먹일 것이 부족하다. 돼지가 어릴 때는 먹는 양이 적어서 두 식구 밥 짓는 뜨물과 설거지 물, 그리고 보리나 쌀겨 등으로 모자라지 않다. 그러나 점점 자라서 60 kg이 넘기 시작하면 먹이가 부족해진다. 그러면 동네에 돼지를 키우지 않는 집에다 양동이를 갖다 놓고 버리는 음식물을 모아주도록 부탁을 한다. 그리고 몇 일만에 한 번씩 가져다 돼지에게 주곤 한다. 그래도 부족하여 봄부터 가을까지는 들과 밭에 나가 자운영 고구마 순 등, 여러 가지 풀도 베어다 먹인다. 그가 학교 갔다 오면 이런 일들을 거의 맡아 했다. 온갖 정성을 들여 120 kg 이상 자라면 읍내 장사꾼에게 기별하여 판다. 그리고 곧바로 또 새끼를 사온다. 유일하게 목돈을 만져보는 때는 돼지를 팔았을 때이다. 
이렇게 해서 그에게 학비를 주고 책값 등 용돈도 주곤 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실로 돼지가 아니었다면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기란 불가능 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있는 집 자식들도 중학교에도 못 갔는디, 이 애미가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했다. 인자 고등학교까지 졸업 했응게, 면서기를 하든, 남의 집 머슴을 살든 니가 알아서 해라!” 
그 후 그는 무작정 서울로 가서 밤에는 독서실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자고, 낮에는 버스 안에서 책 팔기, 보따리 미역 장수 등을 했다. 그 후 군대를 재대하고, 3년간 공부하여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에서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객지에 보내 놓고 혼자 살면서, 돼지 밥 챙겨줘야 한다는 핑계로 아들들내 집에는 거의 안가고, 오직 농사일과 돼지 키우기를 계속하며 살았다. 몫 돈이 마련되면 어렵게 사는 큰아들에게 주곤 했다. 돼지를 잘 키워 당신의 칠순 때는 동네 사람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돼지박사로 불려 지곤 했다. 
  팔순이 지나서야 “힘드시니 이제 그만 키우시라”는 아들들의 말을 받아들여 그만 두었다. 그리고 평생 경작하던 논 세 마지기는 팔아서 형편이 어려운 큰아들에게 주고, 밭일만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평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안하고, 5살 때 죽은 셋째 이야기를 가끔씩 했다. “읍내 병원에만 데려갔어도 안 죽었을 턴디. 그 때 돈이 없어서 약만 지어다 먹여갖고.”라고 애통해 하셨다. 그는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짐작하곤 했다. “어머니는 아마도 돼지를 키우실 때, 셋째로 생각하시며 정성을 다해 키우시나 보다!” 
  그가 작년 여름에 직장에서 과장으로 승진하여 직원들과 회식하던 날 밤 만취가 되어 귀가 하는데, 천둥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유난히도 요란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께 여느 때처럼 전화를 했더니 안 받아, 이웃집 아주머니께 전화를 해, 좀 가보시라고 했다. 잠시 후“어제 밤에 비오는 소리에 잠을 깨어, 뒤 안 장광에 항아리를 덮으러 갔다가 거기서 쓰러지셨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만 90 세로 고단한 삶을 마감 했다. 
  그는 어머니의 오로지 자식들만을 위한 삶, 그리고 돼지 키우기가 없었다면, 그의 가족이 오늘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피그 데이 이야기를  맺었다.
2019년10월
정읍 샘바다 고향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평생구독자 안영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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