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역사적인 4·19혁명 60주년이 되는 해다. 돌이켜보면 필자는 당시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학년생으로서 정의감에 불타 혁명 대열의 맨 선봉에 섰었다.(*1) 

중앙대학교는 1960년 4월 19일 당시 대학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최후 세력’이었다. 4·19혁명 때 23명(전체 186명)의 대학생들이 사망했는데, 서울대학교와 중앙대학교에서 가장 많은 각각 6명의 희생자가 나왔다.(*2)

4·19혁명 제59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중앙대학교 의혈탑 앞에서 김정일 중앙대 기념사업회 회장(중앙) 좌측으로 혁명 사료를 찾은 김창수 중앙대 총장, 최선웅 본회 부회장 전 한국조폐공사 비서실장), 김정일 회장 우측으로 김중태 총동문회장, 김영관 본회 부회장 (전 대전광역시 부시장) 

  산화한 학우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납덩이처럼 가슴이 무겁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4·19 혁명사를 후세에 제대로 남기고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왔다. 
 그때 희생된 동문 열사들의 잊혀져가는 행적을 되찾아보기 위해 이번에 전국에 산재한 그들의 행적을 찾기 위해 옛 학우들도 만나면서 답사했다.

떠나기 전에 밝혀둘 일이 있다. 중앙대학교 4.19혁명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필자와 같은 정외과 3학년 황복성(신태인읍 신덕리) 동문이야기다 .
그는 4.19혁명 저항정신으로 똘똘뭉친 사람으로 군사정권의 독재에 끝까지 싸우다가 35세에 요절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그의 명복을 빌며 4.19혁명 때 동학혁명 발생지 사람답게 정읍출신 중앙대학교 재학생 4학년 김인겸(전 호남고등학교 교장), 3학년 김정일(전 의정부우체국 국장), 김형래(전 국회의원), 김재준(전 국민체육공단 경륜공정부장) 김병일(전홍 부사장) 2학년 김동훈(전 서울특별시의회 건설위원장) 여섯 김(金)씨 동문들은 최후 세력, 버팀목으로 저항했음을 60년 만에 처음 밝혀둔다.

  먼저 찾은 곳은 영혼부부 김태년 서현무 열사 합장묘였다. 
 경찰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당시“쓸쓸히 진 4월 혁명의 꽃”으로 불리면서  온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던 서현무(여) 열사 비문에는 엉뚱하게도‘중앙대 법과 3년 시위 중 총상 사망“으로 되어있었다. 당시 정보통신부에 재직 중이던 필자는 그 사실을 발견하고, 그 현장에 함께하였던 동지의 죽음이 국가가 잘못 관리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 갈은 공직자로서 자괴지심(自愧之心)으로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래서 4·19혁명국립묘지관리사무소와 보훈처까지 여러 차례 찾아 다녔다. 특히 언론사에 기고문을 통해 잘못된 비문에 대해서 밝혀  ”중앙대 법과 2년 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 사망“으로 바로 잡았다, 이는 ’내무부 앞에서 장관의 면담을 요구하다가 경찰에 끌려가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을 당하고 이틀 만에 석방되었으나 그 후유증으로 그 해 7월 2일 병상에서 사망 하였다.‘를 국가로부터 확인 받아 냈다.. 그리고 부모님의 뜻에 따라 영혼 결혼한 김태년 열사와 합장시켰다. 이와 같은 사실은‘국정신문’을 비롯하여 당시 언론의 집중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3) 
그로 인해 1963년 4월 19일 군사정부시절 박정희 의장이 국가포장수여 이후 공식적으로는 김영삼 문민정부 들어서. 4·19혁명 관련 표창을 최초로 1997년 6월 1일 박상범 국가보훈처장으로부터 표창장(제 8157호)을 받아 수상의 의미기 크다고 고 언론에서 대서특필로 보도하였다. 필자가 잘못된 4·19혁명사(4·19국립묘지)의 지적을 국가에서 최초로 바로잡은 역사적인 사실이었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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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년 만에! 4·19혁명 당시 함께 앞장섰던 중앙대의 학우들을 만났다
좌로부터 행정학과 김종하, 정치외교학과 고영전, 필자 .김정일, 신춘식, 김화택 교육학과 오경남. 익산 4·19혁명 기념탑 앞에서 (2019.6.25.)

 다음으로 찾은 곳은 순천고 출신인 정외과 2년 송규석 열사 묘비다. 고흥군 과역면에 소재한 열사의 모교인 초등학교 정문 언덕에 묘비는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60여 년간 드러나지 않아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발견할 수 없어 너무 아쉬웠다. 
 고흥군 과역면 석봉리 봉촌마을은 송 열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런데도 2016년 12월에 고흥문화원에서 발간한 ‘마을 유래지’(1500여 쪽 분량)가운데 과역면 석봉리 봉촌마을 ‘이 지역의 인물’란에서 이름을 수 없었다. 과역초등학교 외에 고흥읍 현충공원에 세워진 현충탑 후면에 어렴풋이 학생 운동자 ‘송규석’이란 이름 석 자만 적혀 있을 뿐이다. 더욱이 모교 순천고등학교와 동창회 사무실에도 문의했지만 4·19혁명 희생자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가슴에 먹먹한 아픔이 밀려왔다. 과역초등학교 정문 앞에 56년 전에 과역면민들이 세운 ‘4·19혁명에 산화한 고 송규석 군의 위령비’에는 피를 토하는 글만 아로 새겨져 있었다.

 배우는 학도여, 길가는 니그네여
여기 못다 피고 떨어진 꽃이 있다오.
이 땅의 자유가 그립기에 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 날의 총탄 앞에 맨가슴을 헤치고 뛰어 갔더라오.
청춘을 불태워 피 거름으로 가꾼 이 땅 위에 자유의 열매를 맺게 해다오.
배우는 학도여, 길가는 나그네여. 1964년 9월 송 열사 비문을 보면 볼수록 자유를 갈구하는 우리 현대사의 가슴 아픈 역사가 자꾸 생채기가 된다. 비문에 적힌 대로 뜻있는 길손이 볼 수 있도록, 길 안내 표지판(헌충시설물) 하나라도 세워 주기를 후대의 길손이 간절히 바랄 뿐이다.  

 다음으로 충북 단양군에서는 이곳 출신 후배인 지영헌 열사를 추모하는 열정과 정성이 대단하다는 입소문을 확인하고자 나섰다. 이를 직접 확인하고자 지난해 10월 27일 단양군청 장진용 주무관을 사전에 만났다. 그의 안내로 대성산의 4·19혁명 민주금자탑과 그곳에서 11.2키로미터 떨어진 단성면의 지 열사 모교인 단양공고(현 한국호텔관광고) 교정에 세워진 지영헌 열사추모비를 참배했다. 귀갓길에 나선 필자의 등 뒤를 감싸주는 만추의 석양빛이 지 열사의 마음처럼 따뜻하고 안온했다.

  지금까지도 단양에서는 해마다 4·19혁명 추모제를 열고, 지 열사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2006년에는 화강암으로 '4·19혁명 민주금자탑'을 세웠고, 지 열사의 사진, 생애, 경과보고와 함께 중앙대학교 총장의 헌사까지 기록했다. 
  4·19혁명 정신을 그대로 담아 단양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숭앙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숙연함과 동시에 단양이 역시 충절의 고장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년 12월 20일 단양군의회에서는 조성룡 의원 제안으로 4·19혁명 60주년을 기념하는 지 열사 일대기 제작을 위하여 1,000만원의 예산까지 편성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숭고한 목숨까지 바친 두 열사의 예우가 서로 비교되어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여행작가 김정일(재경정읍시민회고문/중앙대학교 4·19혁명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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