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고려사 악지에 보면 백제의 노래로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정읍, 지리산 등 5곡이 있다고 한다. 그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가사가 전하고 있는 노래는 ‘정읍’뿐이다. 지금까지 ‘정읍’에 대한 연구는 수없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모두 노랫말의 내용이나  지은이,  지은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정작 그 노래를 부른 현장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고 단편적으로 추정하여 소개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렇게 현장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는 것은 현장을 찾으려면 발로 뛰어야 하는 힘든 일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연구는 현지에 사는 이들의 몫으로 남은 것이요, 우리가 해야 할 숙제이다. 
 수천 년 동안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 노래의 현장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며, 정읍 사람들의 책임 또한 크다고 할 것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노래가 불리어진 곳이라 생각되는 현장들을 찾아 노래의 현장을 찾는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Ⅱ. 노래의 현장

 1. 아양(阿洋)동 고개(현 井邑詞공원) 
 시기동과 과교동의 경계인 아양동에 있는 고개로 아양산 자락에 있다. 일명 ‘서낭재’라고도 하는데, 현재 정읍사공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여기에 망부상과 망부상 여인의 祠宇가 있다. 매년 11월에 정읍사 문화재를 개최하는데 여기에서 정읍사 여인에게 제사를 지낸다. 전주에서 샘바다(井海) 마을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는 것이 지름길이다. 

 

2. 부사치(夫思峙, 浮蛇峙) 
 과교동 교암초등학교에서 신성리로 넘어가는 샛길로 그리 높지 않은 고개인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흔적조차 찾기가 어렵다. 신성리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30여 년 전만 해도 그 고개를 넘어 현재의 교암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정해 마을과는 한 오리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외부에서 정해 마을을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한다. 지금은 고개 옆으로 신작로가 나 있어 고갯길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그 아래로 연구 단지에서 전북과학대로 가는 큰 길이 뚫려 있다. 

3. 북면 승부리 금곡 마을
 말고개를 넘어 구룡동 휴게소에서 북면으로 가는 길목에 금곡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본래 점촌이었는데, 금곡으로 개명하여 지금은 금곡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 뒷산에 바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고 주민들의 이야기만 전하고 있다.

4. 수성동의 괴바라기 
 연지동 잔다리목에서 신태인 쪽으로 가면 북면 한교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지금은 정읍 제2산업단지가 조성되어 고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괴바라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기다린다는 마을 이름이다. 전주나 신태인에서 정읍으로 오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한다. 

5. 농소동(망제동) 부례마을
 농소동 부례마을 뒷산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여시바위'라 한다. 여우의 방언인 여시를 뜻하는 것인지 여씨(呂氏)를 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이 마을 뒷산의 바위에 올라가 남편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달님에게 빌었다는 것이다. 이곳에 대해 이에 대해 최현식(전 정읍문화원장)은 "부례 마을은 원래 고부군(古阜郡) 우덕면(優德面)에 속한 땅으로 1914년 정읍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거론의 여지가 없는데, 일부 주민이나 지방신문이 보도를 통해 부례 마을 뒷산에 있는 너럭바위를 망부석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고증 없는 감상적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望夫石在縣北十里縣人爲行商久不至其妻登山石以望之恐其夫夜行犯害托泥水之汚以作歌名其曲曰井邑世傳登岾望夫石足跡猶在-新增東國輿地勝覽(망부석이 현북 십 리에 있다. 현인이 행상을 나가 오래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그 처가 산 위의 돌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남편이 밤길을 가다가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 진흙 물의 더러움에 부쳐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를 정읍이라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개에 올라가 남편을 바라본 돌에 발자취가 남아 있다고 한다.)
 어디에서 정읍사 여인이 남편의 무사 귀환을 비는 노래를 불렀을까? 위의 기록에 보면 ’縣北十里’라는 구절이 있다. 거리를 계산할 때는 현청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것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노래를 불렀던 당시의 현청과 또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발간할 당시의 현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발간할 당시의 현청인 지금의 장명리를 기준으로 한다면 3, 4, 5번이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약도를 그릴 때는 현재의 위치를 기준으로 그리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을 잘 음미해 보면 달리 생각할 수 있다.‘世傳登岾望夫石足跡猶在.’라는 말은 당시에 기록한 사람들이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전하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 당시에 노래는 유행하고 있는데 정읍의 문물을 기록하여 보고하는 입장에서 정읍사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현지를 확인하고자 하나 흔적이 없으니 전하는 이야기로 썼을 것이다. 또한 ‘縣北十里’라는 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만 나와 있고 여타의 다른 기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또한 <대동지지>(1864년)에는 설화의 내용은 없고 ‘望夫石北十里’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정읍현지>(1867년)에는 고려사악지와 마찬가지로 ‘縣北十里’라는 말이 없으며, ‘고적조’에서 다른 설화와 같이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 설화를 바탕으로 보면 1, 2가 될 수 있다. 설화 속에 현청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샘바다로 추정한 것이다.
 정읍사 여인이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노래를 부른 곳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뒷산에 있는 바위에 올라가서 달을 보면서 기원을 했을 수도 있고, 남편이 오는지 마중을 나가서 고갯길 곁에 있는 돌 위에 올라서 노래를 불렀을 수도 있다. 마중을 나가서 노래를 불렀다면 어느 곳에서 오는지에 따라 다시 나뉠 수 있다. 전주라고 확신이 서면 1번에 있을 수 있다. 1번은 전주나 태인에서 오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처 없이 떠도는 행상인들이 어디에서 장사를 하다가 돌아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갈림길 이상 마중을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보면 2, 4번이 되는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부사치가 정읍사의 여인이 남편을 기다리며 노래를 부른 장소로 가장 타당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읍사의 부대 설화는 설화로 받아들여야 하며, ‘縣北十里’라는 말에 얽매어 현청이 어디인가를 따져서 현장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왜 縣北十里’라 했을까? 이는 설화를 수용하고 이를 유포하는 층들의 관습적인 언어 표현에서 기인한 것이다. ‘십’이라는 수는 완성을 의미하는 수이다. 이 설화 속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 상태, 남편이 무사하게 돌아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바라는 언중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이러한 표현은 ‘낙양성 십 리 허에, 명사 십 리 해당화야’ 등과 같이 민요에도 잘 나타나 있으며, 현재에도 ‘십 리 대밭 길, 십 리 벚꽃 길, 십 리 화랑’등으로 정확한 길이보다는 십이라는 숫자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北’이라는 방위 또한 신성한 곳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있는 신성한 곳이다. 북쪽은 임금이 계시는 곳, 그래서 북향 사배를 한다. 제사를 지낼 때에도 신위를 북쪽에 모신다. ‘縣北十里’는 내가 임을 만날 수 있도록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긴 공간일 뿐 일정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읍사 노래의 현장은 정읍의 어디나 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정읍사의 여인이 남편을 기다렸던 장소를 찾고자 한다면, 부사치가 좀 더 유력한 곳이라 생각한다. 정읍사 여인이 살았던 백제의 정촌현은 조그만 고을이었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한다. 물론 마을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읍사 연인의 남편은 그런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때에 정촌보다 큰 고을은 고부군이나 태산군이다. 좀 더 멀리 갈 수 있다면 완산주까지도 갔을 것이다. 부사치는 고부로도 갈 수 있고, 태산군이나 완산주로도 갈 수 있는 갈림길이다. 마중을 나가면 갈림길 이상은 갈 수가 없다. 자칫 잘못하면 길이 엇갈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양동 고개까지 가서 기다리려면 완산주나 태산군 쪽에서 온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아마 아양동 고개로 추정한 것은 노래 가사 중에 ‘全져재’ 라는 단어를 전주 시장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全져재’를 전주 시장으로 해석을 한다면 이 노래는 백제의 노래가 아니라 신라의 노래가 되는 것이다. 전주는 신라 경덕왕 때에 완산주를 전주로 개명을 하였다. 부사치는 샘바다에서 거기까지 모두 평야지이기 때문에 여인이 밤에 나올 수 있는 적당한 거리이다. 그리고 남편이 어느 곳에서 오든지 마중할 수 있는 곳이다. 돌의 흔적이 없다고 하나 기록에도 ‘바위’(岩)라 하지 않고 ‘돌’(石)이라 한 것을 보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큰 바위는 아닌 것 같다. 

Ⅲ. 맺음말 
  백제시대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노래’가 오래 전부터 전해오고 있었다. 백제 정촌현에 행상을 하며 사는 금슬이 좋은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장사를 하러 나간 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아내는 날마다 산 위의 돌에 올라 ‘기다림의 노래’를 부르면서 남편이 오기를 달님에게 빌었다. 돌에 발자취가 남을 정도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이야기는 어느새 ‘기다림의 노래’가 행상인 아내의 노래가 되어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노래는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모든 사람들의 정서에 맞아서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에서도 유행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에 정촌현을 정읍현으로 이름을 고치면서 ‘기다림의 노래’에도 <정읍>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고려 말에 이혼이라는 사람이 무고정재를 만들 때, 그 때 유행하던 <정읍>을 무고정재의 춤음악으로 사용하였다. 춤음악으로 사용하면서 춤에 맞도록 재창작하여 <정읍>이라 하고, 그 가사를 <정읍사>라 하였다. 정읍은 곧 정촌현의 여인들이 불렀던 민요이다. 
 이혼이 만든 무고정재는 춤이 아름답고 웅장하여 궁중의 무용으로 채택되었는데, 남편을 기다리면서 부른 열녀의 노래인 <정읍>도 궁중의 노래가 되었다. 궁중에서 모두에게 사랑을 받던 <정읍>은 중종 대에 이르러 이 노래가 남편을 기다리는 열녀의 노래가 아니라 음사(淫祠)라는 누명을 쓰고 궁중에서 쫓겨나게 된다. <정읍사>를 부르던 자리는 <오관산>으로 대치되고 <정읍사>는 가사는 없어지고 대악후보에  <정읍>으로 악보가 전하고 있다. 
 이러한 정읍의 노래를 여인은 어디에서 부르면서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렸을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정읍의 모든 곳이 다 노래의 장소가 될 수 있으나, 굳이 하나를 정한다면 부사치가 가장 유력한 곳이라 생각한다.

 김 문 선(전 고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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