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재영(사단법인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

동학농민혁명은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인도의 세포이 항쟁과 더불어 19세기 아시아 3대 농민전쟁의 하나로 꼽힌다.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 반침략의 민족운동으로 근대이행기 의병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최근의 촛불혁명으로까지 그 정신이 이어졌다.
그러한 혁명정신이 고부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정읍시민의 무한한 자긍심으로 작용하고 있다. 19세기 농민 봉기는 대개 한 군현을 단위로 일어나서 그 지역을 넘어서지 못하였고, 삼정의 폐단과 관리의 가렴주구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정도에 그쳤다. 만약 군현 단위를 넘을 경우, 이는 반란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현의 수령들을 징치할 수는 있었어도 살던 지역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이 농민봉기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대규모의 농민항쟁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혁명 이후 보천교에서는 증산종교운동과 동학의 교조인 수운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는 종교적 활동을 폈으며, 창시자인 차경석(車京石/호 월곡)은 수운과 증산의 종교적인 가르침에 그치지 않고 이를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함으로써 일제강점기 억압과 착취로 짓눌려 있는 민중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차월곡의 부친인 차치구(車致九)는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전 과정에 참여했던 지도자였으며, 혁명 기간에 반드시 아들인 경석을 데리고 다녔다. 따라서 차월곡은 동학의 후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토현 구민사(求民祠)에 차치구의 위패가 전봉준의 위패와 나란히 모셔져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보천교에서 전개한 민족운동은 그 뿌리가 동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암 대흥리에 직물공장을 비롯한 염색공장과 농기구 공장, 유리공장, 옥공장 등을 설치한 것도 왜산물품을 쓰지 않고 자급자족하기 위한 일종의 경제공동체이자 종교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발상은 넉넉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서로 돕고 아껴야 한다는 수운의 이른바 ‘유무상자(有無相資)’ 정신을 본 딴 것이다.

2019년 드디어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황토현 전투를 기념하는 5월 11일(음 4월 7일)로 제정되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난 뒤 15년 만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황토현 전투가 갖는 의미를 새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황토현 전투는 농민군이 관군을 최초로 격파함으로써 혁명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사기가 진작된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관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황토현 전투의 영향이 크게 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농민군 최대의 성과가 전주성을 점령한 것이라면 혁명의 시작인 고부봉기와 황토현 전투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그래서 높이 평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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