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영 칼럼>

14~16세기 중세 유럽의 르네상스는 인간과 종교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 고대 철학과 수학 신학 등 인문주의에 대한 지적인 열망과 탐구 등 문예부흥 운동으로 시작되어 신대륙의 발견, 지동설의 등장, 봉건제의 몰락, 상업의 혁신, 신기술의 발명 등으로 이어져 인류문명의 대전환점을 이루었다. 
폴란드의 천문학자이자 사제인 코페르니쿠스는 천년을 넘게 부동의 정설로 굳어져 온 천체에 대한 지구중심설을 혁파하고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축을 형성하여 돌고 있다는 이른바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우주관을 주장하였다.
 이후 갈릴레오에 의하여 지동설이 확립되고 인간의 우주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이를 토대로 경이로운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후세인들은 이를 두고 어떤 사물의 현상이나 행동의 모형을 논할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끊임없는 관찰과 논의를 통하여 기존의 구태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는 파격적인 변화를 코페니르쿠스적 전환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철학자 칸트는 인간이 객체가 아닌 주체의 자리에 놓여야 한다는 인식론에서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무게감을 여과없이 강조하였다.

우리 말의 용어에 초(超)라는 접두사는 사용되는 용도에 따라 긍정과 부정의 이미지가 혼재되어 그 단어의 뜻을 훨씬 뛰어넘어 놀라울 정도의 엄청난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때로는 비극과 재앙을 예고하는 극도의 위기감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상징적 현상이 되어버린 초저출산, 초고령화는 이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당장 시급하게 꺼야만이 우리 모두가 공생할 수 있다는 초위험적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은 이제 아무도 부인하지 못 할 것이다. 
그 원인과 대책을 논함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앞으로 한 발자욱도 나아가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에 멈춰서서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원인분석이나 정책적 대안으로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인구감소로 인한 지역소멸이라는 단편적 접근의 단계를 벗어나 세계에서 가장 먼저 국가 소멸이라는 대재앙을 예고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세계 최하위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는 이 슬픈 현실이 마치 미지근한 물 속에서 서서히 생명을 잃어가는 개구리의 안이한 체념이 되어버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국가와 지방정부가 저출산 대책으로 내놓는 수많은 정책들이 결코 무용지물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위기감을 인식하고 최상의 정책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고육지책 또한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다. 
주택 공급정책, 사교육비 지원, 보육시설 확대, 노동정책의 변화, 수도권 과밀화 해소, 소아 의료시설 확충 등 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 차원에서 수많은 굵직한 정책들이 쉼 없이 발표되고 세부적인 지원방안들 또한 백화점식으로 나열되어 천차만별 오히려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정부 기관들은 대책회의, 공청회, 세미나, 해외사례 연수 등으로 바쁘게 움직이지만 그 효과는 미미할 뿐이다. 
청년들의 결혼 및 출산 기피 현상에 대한 원인과 대책은 눈과 귀가 아플 정도로 다양하게 넘쳐나고 있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어느 가정이든 결혼 시기를 훌쩍 넘겨버린 자녀들의 결혼과 출산 문제가 최대 관심사가 되어 부모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이 모두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혹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으면서 감히 어찌할 수 없어 숨기거나 간과하고 있는 것은 없을까. 우리 사회 전반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사회적 구조의 불평등과 양극화가 결국 이 모든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고 대책이라면 이를 부인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천정부지의 집값, 광적인 의대와 명문대 열풍, 고용과 임금의 불균형, 기성세대의 맹목적인 물질 숭배 등 청년들의 삶을 소리없이 갉아먹는 기생충 같은 요인들을 방치하고서는 어떤 대책도 백약이 무효임을 당장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기득권 세력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들의 이중적인 두께와 깊이를 깨지 않고서는 그 어떤 묘책도 소리없는 나팔수의 공허한 몸짓에 불과하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 아이에 대한 임신, 출산, 교육, 사회 참여에 이르기까지 내 가정, 지역사회, 국가 등 우리 모두의 진정한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국가와 지방정부는 주어진 예산의 한도 내에서 저출산 극복을 위한 정책과 지원을 최우선적으로 표명해야 하고 의례적인 복지제도의 방편이 아닌 국가 및 사회의 최대 현안으로 정점을 찍어야 한다. 
최근 정읍시가 발표한 일부 출산 장려 지원 제도는 그저 현상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는 내심에 불과할 뿐 청년들의 출산을 배려하고 줄어드는 인구를 늘리자는 정책 목표를 이루기에는 너무나 궁색하고 초라하다. 
국가도 지방정부도 저출산 정책에 대한 혁명적이고 파격적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발상이 필요한 때이다.<정경영 논설위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저작권자 © 정읍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