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병희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지구상의 수많은 종교와 종교의 굴레의 범주 내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살아가게 됨을 인지해야 된다고 본다. 나와의 이념이나 취향이 다르다 하여 폄하 내지는 음해하는 어리석은 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 나름의 지향하는 삶이 있고 자아실현에 있어 추구하는 이상이 있음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무력침탈로 인해 나라의 위기는 물론 민중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요 힘겹고도 고된 생활은 더욱더 가중, 심화 됐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국 종교가 전무했던 당시 나라의 자유 독립을 위해 많은 교단의 신앙인들 또한 일제의 부당함에 반기를 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당당히 대응했던 보천교, 교세가 강성했던 당시 50여동 이상의 고풍스럽고 위용하기까지 한 당대 최고의 교단의 건축물과 방대한 기구와 조직체계로서 가히 추정키 어려울 정도의 700만 이상에 준하는 신앙인을 보듬으며 교의 위상을 과시했던 보천교. 순탄치 않은 세월의 여파에 편승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이다. 전국 도처의 750만의 신앙인의 결속 내지는 응집으로 민족종교로서 최상의 우위를 선점했음은 물론 실의에 빠진 민중들의 삶에 밝은 희망의 메시지를 동기부여 했음을 물론이요. 나라의 국권 회복에도 많은 기여를 했음을 잘 알고 있다.

일제는 교의 부흥과 교단의 성금이 독립기금으로 쓰이게 됨을 저해할 목적의 일환으로 지속적인 탄압과 감시는 극에 달했으며 교의 간부는 물론 많은 교인들이 독립기금과 연류 돼 옥고는 물론, 그들에 의해 위해를 당한 사실이 문헌을 통해 기록되어 있다.

당시 독립운동의 요직에 계신 어르신이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잠시 머무르셨다던 고택. 가끔 그곳을 대하거나 접하게 되면 왠지 숙연해 짐을 물론이요. 새삼 세월의 무상함에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짐을 느낀다.

일제강점기 그들의 탄압과 많은 회유에도 의연히 대처했으며 조국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보천교, 진실이란 묻히기보다는 드러나는 예가 많음을 일깨워준 지인의 말씀이 떠오른다. 바른 역사의 진실이 일부의 부정적인 시각 내지는 가설에 의해 왜곡되는 악순환의 관행을 잠재우고 투명성에 부합되는 힘이 실리길 기대해 본다. 우리의 후손이요 후학들에게는 바른 역사의 가치관의 행보에 역행하는 수순을 밟지 않도록 지성인들의 심성에 응원을 보내드리고 싶다. 각계의 관심은 물론 언론 매체의 힘에 부응 또는 역사의 진실성에 힘을 더하고자 많은 지성인들에 의해 회자 내지는 이슈로 떠오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매사 형평성에 치우침 없이 의로움에 손 내미는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충·효·예를 으뜸으로 중시했던 교단으로서 우리 민족의 민족성 내지는 정서면에 기초를 바탕으로 한 교로서 우리의 일상에 필연적, 숙명적으로 가장 밀접한 교감의 연계 내지는 공감대의 성격을 띤 종교임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음이라 조심스레 나 자신에게 반문해 보고자한다.
신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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