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손수레에 몸을 의지한 노파가 비탈진 골목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손수레가 노파를 의지한 건지, 노파가 손수레를 의지한 건지 확연히 구분할 수는 없으나 빈 상자더미가 등 굽은 노파의 몸집보다 훨씬 더 넉넉한 걸로 보아 피차 버겁기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노파가 귀퉁이에 버려진 작은 종이상자를 발견하고 급히 손수레를 멈추더니 횡재나 한 듯이 그것들을 단 숨에 집어 들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이 갔다. 지폐 한 장을 꺼내어 까칠한 손에 쥐어주면서 “아침에나 보태세요.” 했더니 “밥은 먹었어요. 안 그래도 되는데…….” 예상치 못한 황망한 낯빛으로 시선을 돌리며 지폐를 반으로 접고 또 접어 허리춤에 후벼넣고 노파는 그렇게 총총히 멀어져 갔다.

 엊그제 아침 출근길 집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벌써 봄기운도 완연하게 4월을 향해 가고 있는데 고단한 삶에 겨운 구순 노파의 봄은 요원한 것일까, 아니 그보다 필자의 봄 역시 아직도 혹한의 칼바람이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주변의 우환들이 꼬리를 물고 궐기하는가 싶더니 마침내 실제實弟가 뇌종양 수술을 했다. 그것도 재수술까지 하고서야 한 숨 돌리는가 싶었는데 위암에 간암 말기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병중인 빙모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절망적 몸부림을 다시금 목도했다. 하기사 인간사가 ‘거자필반, 회자정리’요, 나고 가는 것이 순리라지만 막상 마지막 이별의 순간 앞에서 밀려드는 회한과 안타까움에 그만 목이 메이고 만다.

 어쨌거나 요즘은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울다가 웃다가 하루가 가고 또 다가올 내일도 매양 마찬가지다. 인정머리 없는 매몰찬 인간으로 매도당할지는 몰라도 어차피 산 사람은 또 남은 날을 살아가야 하기에.

 상당수의 지인들이 4∙13 총선에 출사표를 던졌다. 자신들의 정치철학과 소신을 당당하게 밝히면서 기존의 정치판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올 것만 같았던 그들이 내심 부러웠다. 말하자면 상대적 열등감이나 박탈감이 한 몫을 했으리라.

 일찌감치 예비후보 등록을 하고 묵정밭과도 같은 표밭을 일궈가면서 출판기념회나 선거사무소 개소식, 후원회 등을 열어가며 발 빠른 행보를 보이던 우리들의 희망의 전령과도 같았던 장한 전사들이 후보 등록 목전에서 하나 둘, 고사하는 현실에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자신의 가치관이나 소신이 유권자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도중하차라는 불명예의 딱지를 달 수밖에 없었던 당사자들에게 1차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지만 그보다 더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은 썩어 문드러진 기존의 정치 벽이다. ‘돈과 조직’이라는 그들만의 리그인 정치판에 신인이라는 청렴한 꼬리표를 달고 이 도깨비 놀음에 안주하거나 안착할 인물은 흔치 않다.

 이쯤 해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공정한 룰에 의한 정당한 게임이다. 하찮은 씨름도 룰을 지켜가며 씨름판에서 해야 유효하듯이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정치, 반칙이 아닌 정칙으로 후보자의 역량이나 소신과 철학이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정치적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사퇴자나 중도포기자의 변명을 합리화 시킬 입지는 옹색할 수밖에 없으나 필자는 그들의 고뇌에 찬 결단을 존중하며 격려하고 싶다. 비록 잠시 꿈은 접었을지언정 오늘 이 순간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내일의 시작이기에.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지 않는가, 이번 총선에서 우리 유권자가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정치판에 신물이 나서, 증오와 환멸을 느낀다고 해서 내 한 표의 권리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나마 좀 나은 사람이라도 선택해야겠다는 다짐으로 모두 투표장으로 걸음을 옮겨야 한다. 정치적 소신이나 철학은 고사하고 당의 정체성조차 개를 주어도 모자랄 ‘그 놈이 그 놈’이 아닌 아주 조금 ‘더 나은 놈’을 가리기 위해.

 춘삼월이라는데 육신에는 으스스 한기가 돈다. 다가올 4월도 춥고 잔인할 것 같다. 이 지독한 악연의 사슬을 끊기 위해 유권자들은 분연히 궐기해야 한다. 적어도 또 다시 다가올 4월은 이보다 좀 더 따뜻하고 행복해야 하기에.

 

 

최광림 본보 칼럼위원
·시인
·문학평론가
·토요신문 주필
<ckl0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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