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담임을 하면서 나의 리더십에 회의를 느낄 때가 많았다. 의욕을 갖고 1년을 시작하지만 아이들은 나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학급을 위해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노력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은 럭비공처럼 이리저리 튀었다. 부족한 점을 보완해 이듬해 더욱 열심을 낸다고 했지만 여전히 학급운영은 안갯속이었다. 결국 나는 리더십이라는 것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런 내가, 리더십에 대한 나의 회의에 대해 조금 회의하게 된 것은 히딩크라는 국가대표 축구감독을 지켜보면서였다. 그는 1년 6개월 만에 한국 축구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다. 14년 전, 그는 결국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축구팀을 4강에 진출시키는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것이 스포츠라고 하는, 감독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행사되는 특별한 공간이라는 벌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그의 지도력에는 확실히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다. 
히딩크가 감독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에 대한 ‘분석’이었다. 분석 결과 '기술은 있는데 전술이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숨차고 바쁘게 운동장을 뛰어다니기는 하는데 그 움직임이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히딩크가 내세운 치료법은 ‘조직력과 생각하는 축구’였다. 
그 치료를 위해 구체적인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가장 먼저 ‘기본기’ 훈련이 진행됐다. 하지만 그 훈련은 예전의 그것과 달랐다. 예를 들어, 선수들은 단순한 패스 훈련이 아니라 강하게 패스해야 할 때와 약하게 패스해야 할 때를 구분하여 연습했다. 그리고 기본기 훈련의 하나로 체력훈련을 병행했다. 
"체력 없는 전술과 기술은 없다. 즉, 기술과 전술은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체력이란, 대다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힘을 세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때의 체력이란 씨름 선수의 체력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힘의 역할과 배분이 중요했다. 어느 곳에서 어떤 힘을 써야 하는 지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래야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전술훈련’은 그 후에야 시작되었다. 오히려 전술훈련 기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기본기의 바탕 속에서 하는 전술훈련은 어렵지 않게 진척되었고, 힘과 기술의 적절한 안배를 통해 상대를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지향점 없이 그냥 운동장을 뛰어 다녔다면 이젠 자신의 역할과 기능을 떠올리며 뛰는 ‘생각하는 축구’를 하게 된 것이다. 
물론 무리가 있겠지만, 인생에도 이러한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보곤 한다. 삶이 실타래처럼 엉키기만 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스스로에 대한 분석이 아닐까 자문해본다. 물론 삶은 스포츠가 아니어서 분석의 결과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삶은 단순히 육체적 스포츠가 아니므로 분석이라는 단어보다는 ‘성찰’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 과정에서 문제점을 발견한다. 문제점은 정직하고도 냉정한 성찰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후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치료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구체성이 필요한 대목이다. 구체성이 떨어지면 실천이 어려울 것이다. 치료는 기본적인 것부터 한다. 생활습관의 개선이라든가, 작은 결심, 인내의 훈련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후에 가능하다면 좀 더 크게 인생관이나 가치관 따위를 점검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히딩크의 기본기 훈련이 너무 힘들어 하루를 시작하는 게 두려웠다고 선수들이 말했던 걸 보면, 삶의 치료법도 사실은 그 기본기를 닦기가 힘든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 다음 비로소 ‘삶의 기술’(삶을 유지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익혀야 할 것이다. 공부라든가 특기, 능력, 적성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나를 감싸고 있는 세계(상대팀)에 대한 분석도 필요할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씨앗을 뿌리기 전에 밭을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실 세계는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은 그다지 추천할 일이 아닌 듯하다. 짙은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자신에 대한 냉정한 분석(성찰)’일 것이다. 
효과도 의미도 없이 그저 뛰기만 하는 선수들처럼,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바쁘게만 사는 인생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지 바쁘다는 것이 삶의 의미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단지 숨차다는 것이 삶의 내용을 채워주지는 않는다. 생각 없는 열심이 삶의 결과를 보증해 주지 않는다. 
두툼한 적금통장과 근사한 자동차, 값비싼 옷과 화려한 보석, 넓은 아파트, 장롱 깊숙이 간직해 둔 땅문서만으로 삶의 무의미는 가려지지 않는다. 무의미는 쫓아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의미 있고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때 무의미는 저절로 도망치는 것이다. 어둠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고 빛이 들어왔을 때 자연스레 도망가듯이.

박기웅 본보 칼럼위원
서영여고 교사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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