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이른 봄 정읍의 하늘은 차가웠고 사람들은 모두 다 낯설었다. 낮게 엎드린 슬레이트지붕 밑 희미한 전등 아래 버려지듯 불안한 표정의 철없는 아내와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 딸 자식하나 멀리에서 평생을 바치고도 못난 자식 위해 행방도 모른 채 두 손 모으실 내 어머니 모진 가난과 고독 그리고 돌처럼 무거운 생의 빗, 그것이 전부인 나, 뇌리를 스치는 회한의 아픔에 그 밤은 너무 길었다. 세상은 나를 위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둔인지 오만인지 분수에도 능력에도 없는 출세와 일확천금을 넘보며 자초한 패가망신, 나를 원했던 많은 인연들은 실제보다 낫게 평가했을까 원죄자는 바로 나였다. 원망의 대상도 없는 독백 속에 염세행각으로 방랑길을 걷던 허송세월의 아픔보다 나를 지켜보던 수많은 인연들에게 안겨준 상심의 무게가 더 큰 것이 내가 짊어진 상실과 죄업의 짐이었다. 이제는 사회밑바닥에서 잡초처럼 누어 조석을 근심하는 생활인으로 순수한 인생수업의 새내기가 되었다. 날이 가면서 늘어가는 인생의 동료들 그리고 지역유지분들과의 교류 삶을 위해 구할 것과 구할 곳 모두 정읍이라는 확신, 말과 생활습관 그리고 두 아들을 생산하여 다섯 가족이 된 홍복은 정읍사람이 되기 위한 명분이었다. 닫쳤던 마음을 열어 정읍을 바로 아는 것은 주민의 기본 예의다 천혜의 명승 내장산의 빼어난 절경에 걸맞게 조선의 명신 최치원과 무성서원 불후의 충신 이순신과 충렬사 조선말의 애국지사 박준승과 백정기의사 제폭구민 구국안민을 주창한 전봉준의 동학혁명사 백제여인의 부덕을 상징하는 정읍사와 정극인선생의 고현향약과 상춘곡, 분실위기의 이조왕조실록 수호 등 일필난기의 사적들은 정읍이 이 나라의 성지중 하나로 손색이 없는 위상은 가히 상상을 압도했다. 이 고장에 면면히 흐르는 격조 높은 명성은 이 나라 정사에 빛날 뿐 아니라 후예들의 사상을 정의롭게 적셔 언제나 정의 편에서는 올곧은 민심으로 자리매김하여 왔다. 나의 탄생이력은 김제 백구출신의 아버지와 정읍 태인 출신의 어머니는 왜정시절 운명처럼 충청도 부여 땅으로 이주한 후 나를 낳았고 나는 다시 운명처럼 순창복흥이 고향인 아내와 일가를 이루어 정읍에 뿌리를 내렸으니 제2의 고향이다. 근세 지성 중 한분인 성철스님은 법어를 통해 자기를 바로 알라 남모르게 도우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당부한 바 있었다. 부족하지만 사회봉사의 원을 세우고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충효사상전수강사가 되어 계림원 무료 한문교실을 열고 초중생들을 대상으로 한문교육을 통한 인륜도덕과 효제충서의 도리는 물론 생활예절과 인격수양으로 미래세대를 주도할 민주시민의식 고취에 봉사하였고 민선자치원년부터 역대 시장님들의 배려로 민방위강의를 통한 투철한 국가관과 민주시민으로써의 사명의식함양을 강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일등시민운동을 주창하며 나는 누구인가를 돌아보는 감히 자기성찰과 세응종덕하고 생각을 바꾸는 시민의식 고취도 강조한바 있습니다. 다행하게도 우리고장은 늦었지만 명성에 걸맞은 현대화사업들이 활발히 전개되어 백년낙후의 구태를 벗고 당당히 현대문명 대열에 선다는 사실은 지도자들의 탁월한 능력과 깨어 있는 시민들의 참여가 이루어 낸 결과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방랑의 길을 멈추고 대대로 뼈를 묻을 정읍을 만나 일생을 기대게 한 정읍과 정읍인을 사랑하며 아직도 충정을 바칠 곳이 있는지 찾고자 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정읍을 사랑합니다.(최 병 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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