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이 눈부신 계절이다. 봄비 촉촉 적신 들녘은 상큼하다 못해 감미롭다. 혹한과 눈보라를 이겨낸 인고의 결실이다. 깊은 어둠과 동면을 이겨내고 새로 태어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낮은 보폭에 적당한 음계로 졸졸 소리 내어 흐르는 계곡물조차 한없이 정겹고 반갑다.

 푸른 하늘을 유영하는 구름 한 조각, 이따금 귓불을 스치는 바람이 전해주는 소식에 왠지 모를 그리움이 묻어난다. 이제 새싹들은 저마다 푸른 몸치장으로 고운 자태를 드러낼 것이고 이 땅의 모든 만물들은 충만한 생명력과 활기로 넘쳐날 것이다.
 이렇듯 자연의 섭리는 미물인 인간들에게 늘 지극한 경이를 선물한다. 거만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꾸밈이나 치장 없이도 넉넉하고 눈부신 이 무언의 가르침 앞에서 흐트러진 자신을 다잡아보는 시간이다.
 ‘베푸는 데에는 높고 낮은 수직관계가 생기지만, 나누는 데에는 수평적인 유대를 이룬다. 이 나누어 가지는 보시에 의해 우리에게는 비로소 이웃의 관계가 형셩된다. 그래서 보살행 중에서 보시를 제1바라밀(해탈 혹은 피안의 경지)이라고도 한다.’ 문득 떠오른 법정스님의 말이다.
 나눔이나 베풂 모두 보시일진데 작은 차이라면 수직과 수평적 관계논리다. 이 작은 차이 하나가 균형감각을 상실시키고 종래는 군림과 복종의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베풂에 인색하고 나눔의 미학에 충실하는 그런 삶의 교훈을 이 말에서 찾아야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 시간도 안팎으로 혼란의 파고는 거세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부적으로 극한 혼란이 수습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대다수 국민을 혹독한 추위와 분노의 용광로로 내몰았던 박근혜의 연이은 탄핵의 가결과 인용, 그토록 바라던 구속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빅근혜는 내려오고 세월호는 올라오라.’는 피맺힌 외침과 절규가 현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허전함과 씁쓸함이 몰려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만큼 아직도 이 사회가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깊은 까닭이다.
 박이 구치소에 수감되자마자 패거리들의 동정여론몰이가 심상치 않다. 두 번 죽인 가혹한 형벌이라느니, 벌써부터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구속 1일차 미결수 수인번호 503번 박근혜 사면운운은 되풀이되어 온 한심의 극치다. 반성을 전제로 한 꼬리표를 달긴 했지만 이는 결국 화해와 용서라는 지난날의 적폐를 답습하는 모욕적 추태다. 아니 반성만 하면 사면하겠다는 궤변의 논리를 대입시킨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교도소는 존립의 이유가 없다. 정신 넋 빠진 정치인들아, 사면이 무슨 너희들의 전리품이냐? 정말 이러다가 박근혜 감방에 삭스핀과 송로버섯이 배달되고 날마다 변기라도 교체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야쿠르트 몇 개, 라면 몇 개 훔친 죄값으로 징역형을 살아야하는 참혹한 소시민의 삶을 단 한 번이라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아파한 적이 있다면 어디 감히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가, 아니 사면하려면 뭐하러 탄핵하고 구속시켰는지 그 잘 난 무리들에게 되묻고 싶다.
 이쯤해서 국민과 정치권은 좀 더 냉정해 질 필요가 있다. 먼저 무소불위의 권력을 독식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막을 내려야 한다. 이 길만이 국민과 나라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그 다음은 특사 절대불가다. 인정이나 값싼 동정, 화해와 용서라는 이름으로 쌓인 적폐가 오늘날 나라를 이 꼴로 만들었다. 진정한 적페청산은 엄격한 법치에서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우선 위의 두 가지 문제만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을 잘 뽑자. 
 박정희가 총으로 잡은 권력을 총으로 빼앗겼다면 그 딸인 박근혜는 국민들의 요구와 법에 의해 권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처럼 참담한 결과는 자기성찰의 부재와 진실의 부정에서 온 사필귀정의 산물이다.
 정의와 불의의 싸움을 좌우 진영논리로 내몰아 태극기조차 능멸한 박근혜 정권, 자신의 지지자들을 방패막이로 활용하면서도 셋이나 죽어나가는데 애도도 그 어떤 유감도 표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포토라인에 서서 던진 유일한 말은 ‘송구스럽다. 조사 잘 받겠다.’는 몇 마디 겉치레식 수사뿐이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탄핵 대통령, 304명의 고귀한 생명이 희생된 세월호가 가라앉을 때도, 1,073일이 지난 세월호가 수면 위로 올라올 때도 올림머리에 열중한 그녀, 설령 본인 주장대로 엮이고 모르는 일이었다고 쳐도, 단 한 번이라도 국민들의 분노나 상실감을 가만해서 진심어린 사죄라도 한 적이 있는가, 박근혜씨, 비록 많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 제발 좀 솔직해집시다. 
 4월은 잔인한 달이다. 하지만 4월이 주는 잔인함의 의미는 바로 찬란함의 역설이다. 베풂과 나눔이 종이 한 장 차이듯 문제는 잔인함도, 찬란함도 모두 우리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최광림
-칼럼∙논설위원
-시인∙문학평론가
-토요신문 주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저작권자 © 정읍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