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지난11일 밤, 모 쌍화차 집에서 필자가 직접 들은 말이다. 꼭 해야 할 사업은 안하 고 하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예산의 집행이 많다는 지적이다. 그날 밤 필자는 K선배로부터 'ㄱ'국가기관 간부근무자들을 몇을 소개 받았다.

인사 후 대화중에 필자가 정읍서 살면서 좋은 점과 불편 및 시정해야 할 것을 묻는 과정에 서 나온 얘기들이다.

첫 번째는 택시기사들의 불친절을 꼽았다. 그래서 필자가 국민의 돈을 투입해서 내장산 브 랜드 택시까지 만들고, 정읍의 첫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데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말투와 복장 그리고 비상식적인 과다 요금청구였다며, 영수증을 갖고 있다는 말도 했다.

그런가하면 그들은 푹푹 찌는 날, 공용터미널 대합실보다 밖이 더 나았던 지난여름의 불편 함과 답답함을 지적했다. 시내버스 얘기도 나왔다. 시간표가 들쭉날쭉했고 노인 승객, 승차 거부도 봤기에 시관계자에게 개선의 시급성을 거론했더니 오히려 시내버스 입장을 대변하더 라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필자에게 전했다. 그날 밤 괜히 서울 대도시보다는 돈도 적게 들 고, 공기도 좋고, 살아보니까 괜찮은 곳이지요?했다가 날벼락 같은 그들의 푸념을 들었던 것 이다.

새만금지역으로부터 밀려오는 미세먼지는 전국 최고치에 달한다는 놀라운 얘기도 필자는 그 날 처음 들었다. 정읍이 축산악취란 오명에서 소성면 일부지역이 미세먼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을, 전국뉴스를 빌어서 필자에게 전한 것이다.
그러면서 정읍서 1년 이상을 살아온 간부 부인은 최근 정읍우도농악을 배우는 중이라고도 했다. 농악에 관한 불협화음과 이해관계인들의 불필요한 예산 오남용과 생색내기에 대한 불 편한 진실을, 이방인인 그녀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퇴직 후에 정읍으로는 귀농 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날 밤 필자는 매우 낯부끄러웠으며 씁쓸했었다.

내 돈 아니라고 해서 국민의 돈과 조합원, 회원의 공공성 재산을 편성, 집행함에 있어서 떳 떳한지 지금이라도 칼자루를 쥔 자들이여, 제발 되돌아보았으면 싶다.

역사의식과 함께 생각을 갖고서 살 때이다.

8월15일 어제는 광복72주년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되찾은 날로 기억되는 기쁘고도 슬픈 날 이다. 양반지도자와 위정자들의 무능과 함께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간파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리고 내 눈앞의 이익과 당리당략을 조성했던 시기질투가 만들어 낸 합작품의 결과는 비 참, 가혹했었다.

1919년2월 독립이유서 기초를 작성하고, 3월1일 역사적인 조선자주독립을 국내외에 고하는 사건에는 목숨을 담보로 한 33인의 민족대표자가 있었다.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구성을 보면 천도교대표 15명, 기독교대표 16명, 불교대표 2명으로 모두 종교계 인사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훗날 학자들 사이 민족 전체의 대표로 보기에는 무 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3.1만세의거를 일으킨 공로만큼은 결코 폄훼할 수 없다는 결 론이 다.

당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중 30인은 모두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에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제통치가 계속되면서 변절하는 인사들도 나타났다. 천도교신파의 거두 최린, 기독교계의 박희도, 정춘수가 바로 그들이다.

물론 그 이전과 이후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대한조선의 독립을 위해 평탄대로의 관직을 내팽 개치고 또한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고 목숨까지 담보로 한 투쟁을 해왔다. 시쳇말로 진정한 열사요 투사이자 의인들인 것이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하면 이준, 너무도 유명한 안중근, 고종의특사로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인 만주 서전서숙의 설립자 이상설 등이 바로 그들이 다.

이번 광복절을 전후하여 우리는 역사의식 없고 생각 없이 그동안 또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다함께 되돌아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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