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최후세력’의 실상(중대신문)

60년 만에 동학혁명 발상지 후손이 찾았다 (주)정읍신문l승인2020.03.20l수정2020.03.2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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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여행작가 재경정읍시민회고문
중앙대학교 4·19혁명기념사업회 회장

 마지막으로 찾아 간곳은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 대현고개에 있는 신문학과 1년 전무영 열사의 묘역이었다. 
 이곳은 열사의 친족들이 사는 고향마을이기도 했다. ‘진말 전씨종친회’는 회비를 모아 4·19기념추모회를 매년 열고 있었다. 또 2년 전에 새로 세웠다는 묘비도 잘 단장돼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 열사는 1남 4녀 중의 외아들인지라 전 열사의 희생으로 집안이 절손됐다는 아픈 사연도 방문 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전 열사의 묘비는 4·19혁명 때인 1960년 7월 25일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 재경진해 유학생들과 진해시민, 진해고 동창회에서 낸 성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동안 세월의 풍파로 인해서 묘비에 적힌 글이 자획을 분간할 수 없어 매우 안타까운 차에 2014년 11월 15일 전석호 씨를 비롯 친족들이 뜻을 모아 오석(烏石)으로 다시 깔끔하게 묘비를 만들고 무덤도 둘레석 으로 단장한 후 제단석도 새로 만들었다고 비문에 각인(刻印)되어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4·19혁명기념 도서관 3층에 자리 잡고 있는 4·19혁명희생자유족회(회장 정중섭)를 찾았다. 전 열사 유족의 본적지 주소를 알려 주어 어렵사리 사촌형 전석호(전 경남여상 교장) 씨와 그 분의 아들 전원일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필자의 나이(80) 탓으로 비사(祕史)를 전부 수용하기는 다소 버거웠다, 
 열정적인 전 시인에게‘당신의 뜻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격려한 후 취지를 기고문식으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 뒤 진말 전씨 김해종친회에서 2014년에 제작한 '4·19혁명 순국열사 전무영 행정록'을 비롯하여 보존하고 있는 그간의 많은 자료를 소포로 보내주었다. 그 안에는 전무영 열사, 4·19혁명의 상흔과 남긴 혼(魂)’이라는 글이 있었는데 A4용지 13장에 이르는 장문이었다. 조카인 전원일 시인이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전 열사를 고향집에서 만난 후 4·19혁명으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기까지의 아픈 상흔(傷痕)이었다. 집안의 내력과 전 열사가 일본에서 출생하여 해방과 함께 귀국한 과정 그리고 형제애와 친족애까지 매우 정감 있게 쓴 회고한 내용이었다.

 전 시인은, 시인 겸 소설가가 된 계기는 열사의 절명(絶命)으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작품(에세이집 ‘나무병원’ 장편소설 ‘하동역’)속에도 어김없이 전 열사에 대한 회고가 곳곳에서 배어나온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던 그가 받은 충격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시의 소재로 승화되어 있었다. 그 정성이 아무리 친족이라 해도 여간 가상치 않았다. 한편 고병래 열사의 추모비는 1960년 8월 15일에 상학과 3학년(대표 강영석) 급우들이 성금을 모아 처음으로 열사의 고향인 당시 전북 금산면(현. 충남 금산읍)에서 추모비 제막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장안의 관심을 모았다. (중대학보1960.9.1.)
필자와 함께 1962년 동기들이 졸업하던 해 4월 2일에 약학과 김태년 열사와 상학과 고

 

중앙대 4·19혁명 시위 헌장에서 대퇴부 관통 총상을 임었던 신세호(철학과 1학년)동문을 맞이한 강영식 4·19혁명공로자 회장<중앙>과 김정일 중앙대학교 4·19혁명기념사업회장 <우>(2020.3.4.)

병래 열사도 명예학사수여식을 가졌다. 제1호는 김태년, 
제2호는 고병래 열사였다.(중대신문 1962. 4. 25) 명예학사 제2호 고병래 열사의 추모비 건립에 앞장섰던 강영석 동문이 지난해 5월 17일에 4·19혁명 공로자회 8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명예학사 제1호인 김태년 열사와 서현무 열사를 합장시켜 준 필자도 중앙대학교 4·19기념사업회장으로서, <중앙대동문회보>에 화재의 동문(2019년 11월 27일자 11면)으로 ‘4·19혁명 정사(正史) 산 자의 몫’이라는 글과 사진이 함께 전면에 걸쳐 기사화된 바도 있다. 

이렇게 희생자가 6명이지만 중앙대 출신들조차 그 사실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없었다. 그 이유는 당시 <중대학보>(1960.5.1.))가 없어져 그 뒤 축쇄판(1986.3.20.)에서도 결호로 처리되어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4)  수 년간의 노력 끝에, 중앙대 4·19혁명기념사업회는 소중한 자료 일부를 찾았다. 지난해 6월 중앙대학교 김창수 총장의 집념으로 60년 전 당시 신문, 영상을 찾아내서 신문을 대형으로 인화하여 필자에게 보내주었다.(*5)  
그 신문에는 문단의 원로소설가 신상웅(당시 영문과 2년)이 당일 시위 전 과정은 물론 병상까지 찾아가 기명(記名)으로 단독 취재한 기록이 담겨있다.

이 기사에는 4·19혁명이 성공하자마자 그해 5월 3일 학도호국단이 어용적이었다 하며 해체되면서 퇴출당하였던 정황도 드러나 있다(*6). 당시 총학생위원장(학도호국단) 이원방을 필두로 고문후유증으로 그 해 7월 2일 사망한 서현무 열사, 열사와 중부경찰서유치장, 병상(세브란스병원)을 함께한 홍관옥 박사(국문과 2년), 임혜란(국문과 2년) 등을 비롯한 구속당했던 16명의 아름이 선명히 나와 있다. 총탄을 맞은 신세호(철1), 조관휘(물리과 4년), 김학중(행정과 3년) 지길환(상학과 2년) 병상 위문환자를 비롯한 13명의 이름도 뚜렸이 기록되어 있다.
4·19혁명 당시에 중앙대 재학생 6명이 희생되고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려 그때 호외신문(동아일보 호외 1960. 4.21)에는 중대생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4·19혁명을 진두지휘한 이원방위원장의 퇴출, 중대학보 분실이후 중앙대학교 4·19혁명사 이야기를 널리 알릴 이도 신문도 모두 사라졌다. 증거는 1996년도‘예문’에서 발행한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새대”라는 책자에 중앙대학 6·3시위 때 한강 도하(渡河)부분에서 4·19때도 겪어 보지 못했던 학생운동사 가록적인 사건이라고 기술하였다. 이때 필자는 출판사 방문, 엄중 항의로 중앙대학생들이 한강을 건너 역사를 바꾸었다 는 정정내용을 붙여 판매하였다(*7) 

4·19혁명 60년이 지난 현재 4·19혁명 정부 포상자는 895명이다. 그럼에도 중앙대생들이 4·19혁명의 ‘최후 세력’임에도 현재까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역사훼손으로 인해서, 지금까지도 서현무 열사를 제외 한 15명 중 공로자는 홍관옥 동문 한 분뿐이다. 부상자는 13명 중 조관휘. 김기섭, 안겅호, 세 동문 네 분만 인정받고 있다. 나머지 동문은 국가 포상제도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고, 이원방 선배님과 은천기 후배님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4·19혁명 60주년을 맞아 새로이 찾아낸 60년 전의 중대학보를 근거로 4·19공로자 및 부상자들이 정당한 포상과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 이런 노력은 개인의 명예회복은 물론 인권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일이라 믿고,  본인은 계속 여생(餘生) 동안 민주와 정의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고양(高揚)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일이야 말로 중앙대학교의 저 위대한 4·19혁명기록의 한 페이지로 되는 것이다. 중앙대학교 교훈“ 의에 죽고 참에 산다”를 불러 본다  

<* 자료
*1. -「민주혁명 발자취」’<동아일보> 이강현 편 중앙대학교 편 177쪽 정음사      (1960.7.10.)
   -「중앙대학교 법정논총」 제16집 당시 정외과 3학년 김정일 논문 155-162쪽     (1963.8.1.)
   - <국정신문> 4·19 묘지 비문 바로잡기 김정일 정보통신부 체신금융과장       (1995.11.27.)
   - <서울신문 뉴스피플> 4·19국립묘지 잘못된 비문 바로잡아 정보통신부 金正一  (1996.4.18.)
   - <여성신문>  4·19혁명 여성주역 서현무 35년 만에 사얀규명                 (1995.12.22.)
   - <여성신문>  - 지상공개 -4·19혁명 여성열사 서현무 선생 유고              (19966.28.)
 - <동아일보> 고문으로 최후 35년 만에 확인, 중대 동문 김정일씨 노력          (1996..4.19.)
   - <강원일보> 4·19국립묘지 희생자 묘역기록 바로잡은 공로 보훈처장상 수상    (1996.6.17.)
   - <강원도민일보> 4·19희생자 서현무씨 잘못된 비문 고쳐 국가보훈처장 상 표창 (1996.8.17.)
   - (정읍신문)   문민정부 최초의 4·19 관련 보훈처장상 수상 의미 커            (1997.7.2.)
    -조인형 박사 「 4·19혁명 정신과 시대적 사명」 102-104 쪽 221쪽            (2017.12.5.)
   - <중대신문> (개교100주년 특집호 2면) ‘불의에 항거한 6인의 열사’ 증언    (2018.10.8.) 
*2.-김정일 편저   「한국 최초 공무원 연수기」 4·19혁명 노래 듣고 싶다        (2002.2.25.).
   -  <오늘의 한국 7월호> 끝나지 않은 4·19혁명 55년 돌본 산화의 넋 (56-61쪽)  (2015.5.1.)
   - <중앙대학교 동문회보> 4·19혁명 기념사업회장  여든의 나이에 생생히 증언   (2018.6.15.)
   -  <순국(殉國) 7월호>  신기정 ‘4·19혁명 당시, 중대생의 의혈’88-93쪽      (2018 7.1.)
   - cuscm「중앙대학교 기독학생연합회 70년사」‘4·19혁명 참여’168-174쪽    (2018.11.10.)
   - 「四月民主革命」 ‘ 앙대 4·19혁명 6인 희생자 기념탑(의혈탑)’화보 6쪽   (2019.1.19.)
  - <중앙뉴스>  6명의 희생자를 낸 중앙대 4·19 -전대열 칼럼 니스트-          (2019.4.22.)
 - <오늘의 한국 11월호>‘하늘도 울고 땅도 우는 슬픈 이야기’송규석 열사      (2019.11.1.)
 - <고흥신문>  4·19혁명, 송규석 열사의 못다핀 꽃 한 송이 (1) (2)        (2019.11.15., 12.26)
 - <중앙대학교 동문회보> 화제의 동문 김정일 4·19혁명 정사(正史)는 산자의 몫  (2019.11.27.)
 - <전남일보> 4·19혁명 송규석 열사를 아시나요                               (2019.12.4.)
 - <광주일보> 4·19혁명 두 열사, 하늘과 땅 차이였다                          (2019.12.13.)
 - <충북일보> 4·19혁명 정사(正史)는 산 자의 몫                              (2019.12.19.)
 - <전북도민일보> 두 열사 죽음, 하늘과 땅 차이였다                           (2019.12.26.)
- <김해일보>  4·19혁명 전무영 열사는 살아 있다 (상) (하)          (2019.12.26.,2020.1.2.)
- 도올 김용옥 지음 「슬픈 쥐의 윤회」 의혈유서(義血由緖)편 330-363쪽         (2020.1..9.)
 - <한맥문학 2월호> 4·19혁명 그날 산화한 민주열사를 찾아보았다.               (2020.2.1.)
 - <통일신문> 4·19혁명 최후(6인 사망)까지 그 자리에........                      (2020. 2.6.)
- <정우소식 207호) 4·19혁명 최후세력의 ‘중앙대학교 6인’를 찾아서             (2020.2.28.)
-홍관옥 박사 증언 이원방 총학생회장의 인도와 지시를 받으며 인도와, 도로에   (2020.2.13.)
- 신상웅 소설가 증언「민주혁명발자취」에 중대 4·19혁명에 발표’ 4·19혁명 당시                    중대학보는 특호로 발간 그 뒤 발간된 축쇄판에는 결호처리            (2020.2.22.)
- <중대신문> 김태년. 서현무 합장식 비문 수정으로 열사의 넋 달래          (1996.4.15.)       *3  - <대구신문> 4·19희생자 김태년, 서현무의 영혼결혼                         (2012.8.28)
- <조선일보> 55년간 돌봐온 4·19 산화(散華)의 넋                              (2015.4.17.)
- <서울신문> 4·19혁명 영혼부부 오늘도 울고 있다                             (2016.4.16.)
- <조선일보> 4·19국립묘지‘함장묘’의 사연                                  (2016.4.20.)
 *4 -「중대신문 축쇄판」1권 541쪽 결호 ,그 자리 542호 학도호국단해체 기사     (1986.3.20.)
- 신상웅 소설가 증언  4·19혁명 당시 중대신문(중대학보)은 특호로 발간되었으나 무슨 연유에             선지 그뒤 발간된 축쇄판에는 결호처리 되어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2020.2.22.)
  <중대학보>   ‘본교생 경찰서로 연행 16명, 부상자 병원으로 입원 13명’     (1960..5.1.) 
*5 - 도울 김용옥 지음 「슬픈 쥐의 윤회」 의혈유서(義血由緖)편 357쪽            (2020.1.9.)
   - 「4·19혁명사」 상권 집필 김종순 50주년4·19 혁명기념사업회 발행 500쪽   (2011.5.15.) 
   - <중대학보> 1960.5,3‘학도호국단(위원장 이원방) 해체, 학생자치위원회 발족’ (1960..5.11.)
   - 김종순 르포 작가 증언 「4·19혁명사」집필자 중대학보 축쇄판 결호 확인    (2020.1.8)
   - 최재선 명예교수 증언 ‘당시 중대 기독학생연합회 회장 당시 중대학보 기사’ (2020.2.13.)
   - 이명재 문학평론가 증언‘위 단체 해체시 이원방 임시의장 선출, 진행 거부’  (2020.2.26.)
 *6 - <중앙대학교 동창회보>  잊혀지고 묻혀진 4·19,의와 참 (1)  (2)          (1996.5.5.,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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