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연휴 전, 최상기씨로부터 다급하고 흥분된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다. 필자에게 확인을 요청하며 그는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동학과 관련한 것들에서 고부봉기는 없고 무장기포만 교과서에 실렸다. 

기념일제정도 물 건너 갈 것이라는 등의 얘기를 하면서 국회의원을 비롯한 xx같은 x들이 제대로 일을 못한다는 말과 함께 정읍사람들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흥분된 말투로 필자를 다그치듯 그의 말을 전했다.
그의 잦은 전화걸기와 과도한 발언을 익히 접해서 필자 또한 잘 알고 있는 터라, 또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을 그가 보고 들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필자는 당신의 말만 앞세우는 그의 전화를 서둘러 중단하고 몇 군데로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해 보았다. 
확인한 결과 내년 국정교과서 6종을, 학교가 자율적으로 선택하는데 동학과 관련한 기초내용이 고부봉기는 중요시 하지 않았거나 또는 그 대목을 삽입하지 않고서 무장기포를 중요시 다룬 것들이 대부분 교과서에 실리는 것으로 파악이 됐다. 
그런가하면 고창측이 전북일보를 통해서 무장기포의 중요성을 홍보한 것도 확인했다. 어쨋거나 5월11일, 황토현 전승일인 국가기념일이야 이미 법률로 정해졌으니 그 누구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고창측이 무장기포와 관련한 홍보에 열을 올리는 것 등에 대한 정읍시측의 안이해 보이는 대처 방법 등에 그가 화가 났던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는데 지금에 와서도 그렇다는 얘기다.
아무튼 그가 대충 그렇게 흥분하듯 분노하며 밝힌 이유들은 지난주를 전후해 본보에서도 또 정읍시의 대응과 입장을 그대로 지면을 통해 보도를 했다. 
하지만 이 대목쯤에서 우리가 그것만으로 끝내기는 매우 아쉬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가 흥분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필자를 찾아서 따지듯 항변하는 이유를 재설명하고자 한다. 아니 정치인들을 비롯한 정읍사람들과 관청사람들에게 과거를 상기케 하는 등 정읍사람들이 정신재무장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그들과 관련한 과거사적 화법을 재차 상기하듯 거론하고자 한다. 
또다시 우리가 후회하고 그 어떤 집단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지 않기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과거에도 우리는 국가기념일 제정을 놓고서도 오랫동안 인근지역들과 격전이 벌어졌고 정읍에서도 고부봉기냐, 황토현 전승일이냐를 놓고서도 서로가 의견이 분분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는 전봉준 생가가 고택으로 바뀌었다. 
그런 이유들은 우리가 동학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 관계 등으로 당시 이곳저곳에서 정읍의 자존심을 건드릴 때 은관동씨 역시도 그 울분을 참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또한 본보에게 관련 자료를 들이 대고 또는 그의 목격담을 얘기하며 정읍동학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앞장섰다. 아무튼 본보 또한 그런 이유와 언론의 책임감 그리고 독려는 차원에서 계승사업회를 채근하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2009년5월경이니까, 지금으로부터 11년전의 과거사가 됐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정읍시가 안이하게 뒷북행정을 하듯 또는 관련단체가 조금 더 적극적이지 못한 그동안의 행태 등에서 비롯됐다고도 보여 지는 이유다. 그러니까 정읍사람들 역시도 말로만 동학정신을 떠벌이고 또, 필요할 때 동학의 후예만 내세웠을 뿐 적지 않은 사람들의 무관심 등이 많았기에 그랬다고 분석되는 것이다.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된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시작되고 진행됐는데 현재에 와서도 서로가 동학을 내세우며 그것을 빌미로 사업화에도 열을 올리고 있는 양상이 많다.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더 관심을 갖는다는 표현처럼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보존내지는 동학이념과 정신을 계승하면 되는 것을 다른 꿍꿍이들이 적지가 않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그로인한 적잖은 집단들이 동학의 정신계승보다는 그로인한 사업성 등을 내세운 싸움 같지 않은 싸움의 시작은 오래전부터 진행돼 왔었다, 
그리고 또다시 처음처럼 또는 시시때때로 그들(이해관계인)은 언제어디서나 전봉준 생가에 이은 동학 국가기념일 제정을 즈음하여서는 학술적으로 무장기포를 더 강조하고 기록하려는 집요함도 보였다.
그런 고창측의 투자적인 노력은 수시로 또 오래전부터 진행돼 왔음을 우리가 익히 알고도 있는 처지이다. 하지만 어떨 땐 가상하기에 앞서 측은지심 또는 너무 억지? 오죽했으면 그런 것에까지도 그렇게 집착력을 보일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국가기념일 제정 첫 선포식 날, 광화문 광장에서 그들은 무장기포선언식을, 그 때도 그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정읍시가 멍 때리듯 주도적으로 개입하고 관여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그런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기에 그들은 학술적으로 무장기포의 의의 내지는 중요성을 기록하면 되는 것이지, 동네방네 고부봉기를 실패한 봉기라는 등 폄훼해가면서까지 무장기포를 알리려는 의도가 과연 무엇때문인지 그저 궁금할 뿐이다.
또 그들이 무엇을 얻고자 국가기념일 선포식 날인 기념식장에 와서도 무장기포선언식을, 전 국민을 상대로 강조하듯 알리며 방송을 통한 홍보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전봉준의 생가를 고택으로 만들고 고창으로 생가를 가져갔으며, 국가기념일을 무장기포일로 정하지 못하자 작금에는 또다시 역사적으로 무장기포의 중요성을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따라서 그 의도를 우리 또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뭐라 해도 동학농민혁명운동은 농민군들이 최초로 왕권정치와 계급제도에 도전을 한 역사적인 민주화의 첫 시도였던 엄청난 사건이다. 그것의 첫 단추가 고부군수 학정과 수탈에서 비롯됐고 동학의 접주 전봉준과 농민들이 나서서 목숨을 내건 저항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어찌 그것이 결코 작고, 무장기포선언보다도 미약하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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