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18년 만에 후배 전화 받고 서울서 미팅 
정읍서 살았던 추억 아직도 또렷, 본보에 법률칼럼 기고

정읍이 제2의 고향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고마운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은 정읍 땅에서 정읍 사람들과 부닥치고 살면서 연을 맺은 것에 대한 긍정적 추억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6월5일)은 내가 그중 한사람을 만났다. 
그와는 고려대학교라는 학연으로 시작해 정읍서 검찰청 공익법무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나와는 적잖은 인연을 더해 갔다.
정읍 부영아파트서 2002년 6월 신혼살림도 차리고 정읍서 첫 아이도 잉태했고 또, 정읍신문에도 법률칼럼도 썼다. 그런 인연을 만들었던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2주전인가 싶다, 
한통의 낯선 휴대폰 번호를 보고, 고창 신림면 벽송리 산108번지에서 칡넝쿨 제거작업을 하다가 받았다. 알고보니 제21대국회 더불어민주당 강선우 국회의원(강서구갑/원내부대표)의 신랑인 변희경(법무법인 김엔장 변호사) 후배였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의 초청으로 광화문 맛집, 일품향서 점심을 함께 했다.
18년만에 회동이다. 2002년 정읍서 내가 고대교우회정읍지부 회장을 맡고 있을 때 그가 정읍에 온 것이다. 남다르게 사글사글하고 예의바르며 잘생긴 젊은 친구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오랜 세월을 잊지 않고서 정읍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 21대국회가 개원하기에 즈음하여 아내인 강선우 당선자에 대한 기쁜 소식을 내게 전해주기 위해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런 후에 지난 5월22일 변희경변호사는 “정읍은 저희한테 아주 특별하니까요. 서울에 오실 때 꼭 연락주십시오.”라는 카톡 문자를 보냈다.
정읍서 짧은 삶이였지만 변희경, 강선우 부부에게는 신혼의 달콤한 시간을 행복하게 보낸 곳으로 정읍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파트서 바라보는 작은 저수지의 아름다운 노을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도 했다. 
정읍서 얻은 첫 아이가 희귀난치성질환으로 발달장애인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3살짜리 그 아이 치료 차, 2006년 변 후배의 아내인 강선우의원은 당시 혼자 미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공부하며 박사학위를 받고 주립대학 교수가 된 것이다. 
또 강선우 국회의원이 2016년 급하게 귀국해 비례대표 29번을 받고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 등에 대해서도 이날, 나는 변희경 후배의 입을 통해서 상세하게 알게 됐다. 
또한 그는 당시 정읍서 법무부로 올라가 공익법무관 3년 마치고 현직 검판사직을 선택하지 않고 곧바로 법무법인 김엔장으로 들어가서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고도 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특유에 밝은 미소로 내게 전하는 그동안의 스토리는 감동이었다. 평범하지 않았던 부부의 인고의 삶인 그 세월 속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 아름다운 노력들의 결과물이 이제는 활짝 핀 꽃으로 피워졌다. 

그리고 강선우의원이 선거홍보지서 밝혔던 ‘정치가 바로서야 한다’ 절실함을 채울 수가 있게 됐고 또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을 포함한 아이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도 가속도 붙일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만들어 졌기에 이날, 나는 재삼 강한엄마 강선우와 변희경 후배가정에 멋진 화이팅을 기원해 봤다. 
그리고 정읍서의 10개 여월의 짧은 삶이었지만 이들 부부가 정읍을, 늘 그리워하고 마음속 담아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된, 그날 하루여서 나 또한 더욱더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 됐었다.
함께 점심을 먹는 그 시간에도 그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 된 딸의 전화를, 두 번 씩이나 자상하게 응대하는 일상도, 나는 잠시였지만 지켜볼 수가 있었다.(김태룡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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