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기고

안영훈(신정동 정해마을 출신 출향인)

나의 고향 정해마을(정읍 신정동)은 내가 태어나서 고등학교 다닐 때 까지 살았던 고향마을이다.
정읍 발원의 상징인 정해마을 우물과 부부나무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내가 살았던 1970년대 초 까지만 해도 100여 호가 넘는, 대부분이 안 씨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거의 다 돌아가셨거나, 나처럼 먹고 살기 위해 객지로 떠났고, 몇몇 손꼽을 정도의 어르신들만 살고 있다.
그런가하면 신정동 일대가 관광 및 첨단과학 산업단지로 변모하였고
정해마을 바로 위에는 “천년부부사랑 정촌가요 특구”가 조성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외지인들이 많이 이주 해 와서 마을은 더 커지고 마을 사람들도 다른 여느 농촌에 비하면 크게 줄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오랜 만에 한번 씩 가보면 낮선 사람들이 보여 그 옛날 같은 정감은 덜하다.
정해마을에서 북쪽방향 즉 정읍 쪽으로 약 2 킬로미터 위치에 내가 다녔던 교암 초등학교가 있고, 그 중간지점에 큰 개천이 있다.
그 당시 정읍으로 가는 비포장 신작로(그 때는 도로를 이렇게 부름)에는 남자들은 쌀이나 보리 등 물건을 지개에 지고 다녔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정읍장터까지 약 8 킬로미터 정도를 걸어서 다녔다.
나의 어머니도 갈퀴나무를 머리에 이고 가서 팔곤 했다. 드문드문 소 구루마(그 때는 소달구지를 이렇게 불렀음)도 다녔는데, 그 당시에는 소 구루마가 유일한 대량 운반 수단이었다.
신작로 좌우로 봄이면 밭에는 유채 꽃이 만발하고 논에는 자운영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고, 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개골개골 요란하게 들리기도 했다. 유채꽃과 자운영 꽃들에는 벌과 나비들이 날아다니며 꽃들과 대화하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고받으며 그야말로 자연 생태계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고 있었다.
그 신작로를 한참 가다보면 위에서 언급한대로 큰 개천이 있는데, 지금은 2차선 용산교 다리가 있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땐 큰 돌로 된 징검다리가 있었다. 비가 많이 올 때면 내장산 아래 용산 저수지에서 방류되는 물이 흘러와 개천이 범람하면 학교 갈 때 어른들이 학생들을 엎어 건네주곤 했었고, 개천을 건너다 떠내려 가 죽는 사고도 가끔 있었다.
봄이면 마을 서쪽, 그리 멀지않은 서촌산 쪽으로는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아롱 젖어 보이기도 했었다.
지금도 그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고 희미한 기억 속에 아름다운 고향 풍경이 떠 올려 지곤 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잊혀 지지 않는 장면과 사연이 머릿속에 아니 마음속에 각인된 그리움이 있다.
용산교가 있는 개천 앞에서 엄마와 헤어졌던 장면과 사연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인 1954년경 그 때 내가 아마 7살이었을 것이다. 햇볕이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따뜻한 늦은 봄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외갓집에 다녀오신다고 하고 집을 나섰을 때, 내가 엄마를 따라 나선 것이다. “나랑 같이 가!”라고 하면서.
엄마는 집에서 출발해 정읍 쪽 신작로를 따라 가시면서 치마를 꼭 붙잡고 따라오는 나를 달래기도 하고 야단쳐 보기도 하시면서
''엄마 며칠만 있다 올 테니까 어서 집으로 가!''하셨다.
내가 성년이 되어서야 안 일이지만 그 때 엄마는 6·25 전쟁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7살에 청춘과부가 되어, 나와 두 살 터울인 형,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았는데, 전주에 사는 외삼촌께 취직부탁이라도 하려고 가셨던 것이다.
나를 떼어 놓고 가시려는 엄마를 따라 가며 1킬로미터나 되는 용산교 개천까지 따라갔다.
돌 징검다리 개천을 앞에 두고 더 이상 따라오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엄마가 나를 달래고 한편 야단치시며
''어서 집으로 가!'' 그러시는 엄마에게 나는 ''엄마, 그럼 몇 밤 자고 올 거야? 빨리 와!'' 하고는 울면서 발길을 집으로 돌렸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보고 엄마도 많이 우셨겠지!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있는 네잎크로바를 찾기도 하고 크로바 꽃줄기를 꺾어 손목시계를 만들어 손목에 차기도 하면서 집으로 돌아 왔다.
그 후 엄마는 며칠 만에 돌아 오셨다. 
70여 년 전 잠시 엄마와 헤어지면서 따라나섰던 그 신작로와 논과 밭 그리고 꽃과 나비들, 개천과 돌 징검다리 등, 그 때의 장면들이 가끔씩 아련히마음속에 떠오르곤 한다.
그 때는 그래도 엄마가 며칠 후 돌아오셨는데, 7년 전에 돌아가신 엄마는 곧 돌아온다는 말씀도 없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쩜 내가 언젠가 뵈러 가게 되면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엄마도 그립고, 아른거리는 고향 정경이 그리워 가보고 싶지만 그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곧 3월이면 다가오는 7주년 기일을 맞아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아~ 그리운 고향, 그리운 엄마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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