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려는 귀소본능은 여러 동물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추운 겨울을 피해 바다 건너로 날아갔던 제비는 봄이 되면 용케도 지난해에 살았던 제 집으로 돌아온다.

도요새는 호주에서 낳고, 그 곳에서 살다가 적합한 환경을 찾아 머나먼 알래스카로 날아가서 살다가, 다시 제 고향인 호주로 돌아올 때는 1만여 km를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계속 날아서  태평양을 건너온다. 전에 살았던 곳에 도착할 때는 체중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고 한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고향을 잊을 수 있겠는가?

1970년대 초에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온지 어언 50여년이 흘렀다. 고향에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1년에 한두 번은 가곤 했지만, 수년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로는 형님이 살지만 그것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런 고향의 소식을 1주일에 한번 씩 어김없이 전해 주는 편지가 있다. 바로 정읍신문이다.
나는 정읍신문을 읽으면서 특히, 내가 살았던 입암면, 신정리(지금은 신정동), 정해마을이 눈에 띄면 글자 하나 빠짐없이 다 읽는다.

내가 초중고등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정해마을은 정읍까지 가는 길이 비포장도로이고 버스도 다니지 않아 걸어서 통학했으며,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우리 동네 정해마을 바로 옆 논과 밭은 정촌가요 특구로 지정되어 정읍사 가요전시관 등이 건립되어 있고, 동네 바로 위에는 연구개발 특구로 지정되어 첨단 방사선 연구소와 생명공학연구원 등이 들어와 있다. 정해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내장산 아래, 석산 저수지 바로 위에는 내장산골프장과 위락관광단지가 조성되었다.
어릴 때 물지게로 물 길어다 먹고 무더운 여름 밤에 목욕을 했던 동네 공동우물인 井 字형 우물은 백제시대 때부터 사용했을 거라고 유추해 보는 역사적 유적지로 관리되어 잘 보존되고 있고, 여름이면 팽나무에 매달린 그네에서 그네도 타고 팽나무 열매로 총싸움 놀이도 했던, 그 큰 고목나무는 버드나무와 서로 얼싸 안고 있어 부부나무로 명명되어 금슬 좋은 부부사랑의 상징으로 스토리텔링 화되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1960년대에 정읍까지 약 8km 이상을 걸어서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나 스스로 시골촌놈으로 여기며 열등감을 가졌었으나 지금은 정읍사 여인의 마을인 정해마을 출신인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자랑하고 싶다.

정읍신문이 올해로 창간 32주년이라고 하는데, 내가 정읍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한 시기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창간했던 해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서울에서 살면서 경제적 사정으로 이사를 열 번도 더 했지만 그럴 때마다 정읍신문사측에 신문 받아보는 주소를 꼭 알려서 지금까지 꾸준히 구독해 오고 있다.

정읍신문은 1년에 단돈 6만원만 지불하면, 즉 친구들과 술 한 번 먹는 금액만 지불하면 어김없이 고향소식을 전해 준다.

정보화 시대, 인터넷 시대가 되어, 편지도 이제는 이메일이나 카 톡 등으로 주고받음으로써 종이편지를 쓰거나 받는 일도 드물다.

정읍신문도 인터넷 검색으로 볼 수도 있지만, 옛 정감이 있는 종이편지처럼 신문지면을 통해서 읽고 봄으로써, 어제 갓 발행한 신문지 인쇄 냄새에서 고향의 향수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올해 창간 32주년이 되는 정읍신문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전국적으로 구독자가 더 많이 늘기를 바라며, 나는 앞으로도 매주 어김없이 배달되는 '고향에서 오는 편지'를 기다리는 애독자가 될 것이다.
<글, 출향인 안영훈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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