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전북문화살롱』 통권33호에 「백제가요 정읍사 망부석을 찾았다」라는 제하의 깜짝 놀랄만한 글이 실렸다. 글쓴이는 『전북문화살롱』을 주관하는 전 중앙대학교 송화섭 교수로 그는 이로써 그간 논란이 되었던 정읍사 망부석의 위치를 덕천 천곡(샘실) 마을 뒷산의 ‘부엉바위’로 특정하고, 사실 상 확정지었다.

그런데 1차 사료에 근거하지 않은 그의 글은 거의 픽션에 가까운 것으로 읽혀진다. (「백제가요 정읍사 망부석의 역사현장학적 고찰」, 『백제가요 정읍사의 지역문화적 가치 재조명』, 정읍사 학술대회, 2020). 그의 논문은 아무런 논증 없이 ‘샘(물)’과 ‘우물’이 같고, ‘골’과 ‘고을’이 같다는 전제 하에 시작된다. 따라서 백제 때의 정촌(井村)을 ‘샘골’로 보고, 덕천 천곡(泉谷)의 ‘샘실’이 서로 치환된다는 자신의 논리에 따라 백제 때 정읍의 치소(治所)는 현 정해(井海)마을이 아닌 덕천면의 천곡 마을에 있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무려 7년 동안 그는 반복하고 있다. 정읍의 역사를 지금의 정해마을이 아닌 덕천 천곡에서 시작한 것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국내의 어느 학자가 ‘샘(물)’과 ‘우물’이 같고, ‘골’과 ‘고을’이 같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가. 송화섭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충남대학교 도수희 박사의 논문을 인용, ‘천(泉)’과 ‘정(井)’은 고대어 표기로 같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어떻게 같다는 것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관련논문에서는 이 같은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연구결과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정읍은 ‘샘골’이 아닌 ‘샘고을’이다. ‘골’은 골짜기나 깊은 골에 사람이 정착하면서 ‘골짜기(골)’의 이름이 그대로 마을 이름으로 남게 된 곳이다. 정읍에서는 그것이 논실(답곡), 부여실, 지금실과 같은 ‘실’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고을’은 여러 마을을 다스리는 치소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같은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그의 글을 논하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정읍사(井邑詞)’는 말 그대로 원제목이 ‘정읍(井邑)’이다. ‘정읍’은 백제 때 정촌이 757년 신라 경덕왕 때 바뀐 지명이다. 송화섭 본인도 ‘정읍사’는 ‘정읍’이란 지명의 백제가요라고 주장하면서도 망부석의 위치를 ‘고부’와 ‘두승산’ 일대에서 찾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펴고 있다. 샘실(천곡)은 1789년(정조)에 나온 최초의 지명자료 『호구총수(戶口總數)』에도 고부군 우덕면 천곡리로 편제되어 있다. 고부가 정읍 땅에 편입된 것은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했던 1914년 이후의 일이었다. 한마디로 그의 주장이 관철되려면 정읍사 망부석의 위치를 기록한 『동국여지승람』에 왜 정읍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고부군 조가 아닌 정읍현 조에 실려 있는지 그것부터 반론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도 아무 말이 없다. 그 이유는 자신의 프레임에 갇혀 다른 걸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또 있다. 정해(정촌)마을이 이미 고고학적으로 백제 때 치소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해마을을 치소로 주장하는 이들을 ‘선무당’이 일을 그르친다며 ‘지역주의의 저항’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2003년 신정동 일대에서 백제 당시의 유물과 유적을 비롯한 유력자의 것으로 보이는 금으로 만든 귀걸이나 옥(玉), 철제대도와 같은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이에 반해 천곡에서는 별다른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지 않았어도 왜 천곡은 치소가 되며, 반면에 백제시대의 마을 및 집터 유적과 분구묘, 백제토기편까지 유물과 유적이 다량으로 출토되었음에도 신정동 일대의 정해마을은 무슨 논리로 왜 치소가 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먼저 밝혀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덕천 천곡사지 발굴 결과.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로 추정되는 건물지 유구 2동과 30미터 축대를 근거로 이곳에 강력한 백제계 정촌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천곡사지 건물지의 절대 년대를 백제말기 또는 이른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중·후반에서 8세기 전반경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근거로 든 30미터의 축대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전문연구자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발굴조사보고서』에는 “축대를 통해서 석탑과 관련된 절의 규모[寺域]를 추정해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30미터에 불과한 축대를 두고 강력한 정촌 세력이 존재했다는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고서 자신이 주관하는 『전북문화살롱』에 도면을 제시하고, 백제시대 건물지 축대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 역시 『발굴조사보고서』의 내용과 완전 배치되는 내용이다. 

이는 연구부정으로 간주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행위이다. 과학기술부 훈령 제236호(2007)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는 연구결과를 허위로 만들어 내는 위조 행위”에 해당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조란 존재하지 않는 기록을 만들어 냄으로써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통상 위조가 밝혀지면 논문은 철회되고, 학위논문의 경우, 취소되는 절차를 밟게 된다.
이와 같이 연구결과와 발굴결과까지 왜곡하면서 시민을 우롱하는 태도야말로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필자는 정읍사 망부석이 북면 ‘월붕산(일명 월명산)’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서 사료(史料)로 다시 입증할 것이다. 더 이상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사실을 왜곡하면서 시민들을 혼란에 빠트려서는 안 된다.

김재영(한국향토사연구전국연합회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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