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봉기가 없었다면 황토현 전승도, 동학농민혁명 운동이 비록 미완의 실패로 끝났지만 전국화로 번져 나갈 수가 없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돼 고부군수의 학정에 반발해 목숨을 내건 고부 관아 습격이 없었다면, 최근에 와서야 유식한 척하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무장기포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시발점이 된 고부봉기를, 왜 일부 학자들은 폄하하듯 또는 별것 아닌듯 깍아 내리려는 의도가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다.
고부봉기가 우발적이니, 체계화가 안됐다는 등 깍아 내리는지 그 진위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또한 그와같은 발상을 하는 학자들의 기본적 학풍은 어디서 어떻게 왜 역사적 사실을 한낱 몇 사람들이 왜곡하면서까지 그 위대하고 도도한 역사적 물줄기를 바꾸려는지, 심히 그들의 저의가 매우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고부봉기를 민란의 하찮은 수준으로 폄하하는 학자는 상식적이지 못하고 기본이 안된 학자임을 포장한 가짜학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않고서야 어찌 그런 허무맹랑한 엉터리 주장과 같은 기본이 없는 논리를 들이댈까 싶다.어쨌든 동학농민혁명운동의 계승사업은 군부정권 시절에도 정읍에서만 유일하게 성대한 기념제를 해마다 5월이면 축제하듯 이어왔다.
그런데 왜 당시에는 쥐 죽은듯이 가만히 지켜보던 이웃, 고창을 중심으로 한 타지역 사람들과 일부 학자임을 내세운 그들이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겠다는 이상한 논리로 동학농민혁명운동의 국가기념일 제정을 전후로 하여 발악하듯 악착스러운 역사적 왜곡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지 그 진위가 참으로 아리송하다는 것이다.
어느날 이평면 조소리의 정착된 전봉준의 생가를 고택으로 바꾸더니. 이제는 고부봉기를 폄하하고 무장기포가 그 시발점이 맞다는 등, 소수 학자들의 주장을 들이대면서 집요하리만큼 사실 왜곡및 증빙하기가 쉽지않은 오래전부터 고착됐고 명분상에도 맞는 사실 등을 역사를 왜곡하듯 나서고 소수 학자라는 사람들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서 앞장서고 있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동학하면 정읍이었다. 그럼 과거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그 당시의 역사 학자들은 허당이었다는 말인가? 또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정읍에 갑오동학혁명 기념탑을 1963년 10월3일에 전국 최초로 세우고 또 그 당시 박정권의 부름에 나섰던 학자들은 아무런 상식과 역사적 지식이 없이 박정권의 뜻에 부합시키고자 정읍을 동학의 성지로서, 고부봉기가 민주화의 첫 단추를 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가치가 높다고 생각했기에 이곳 정읍에 갑오동학혁명 기념탑을 세운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 운동사에서 그들은 무엇을 그렇게도 얻어가고 싶은지 걸핏하면 사실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듯 정읍 황토현 전승터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또, 고부 봉기의 위대한 농민들의 업적을 폄하하면서까지 고창을 비롯한 일부 역사학자들이 목을 매듯 정읍 동학사를 깍아내리는지 그 진위가 심히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최근 전라도 천년사 발간에서도 박맹수라는 교수는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 이전의 역사로 폄하한 것이 확인됐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며 그는 진정 고부봉기가 없었음에도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의 기치 등을 외치며 왕권에 도전한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번져 나갈 수가 있었다고 보는지,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튼 우리는 도대체 당신들의 그 어설픈 역사적 사고와 부정확한 부정적 역사 왜곡인식에 그저 분노를 느낄 뿐이다. 
오래전부터 문교 및 교육부의 의무교육을 필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동학농민혁명 운동사에 정읍과 고부 봉기를 떼어 낼 수가 없을 익히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지금도 네이버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치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김기범 손화중 김개남 등의 동학 지도자들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대항하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 안민을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갑오년에 발생한 이 농민 운동은 주변지역에 급속도로 파급되어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처음에는 지역적인 민란의 성격을 지녔으나, 이후 확산되는 과정에서 지역적 봉기를 지양하고 반침략·반봉건을 지향하는 즉, 총체적 사회구조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전개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학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한림학사)
역시, 다음 백과서도 동학농민운동이라고 찍으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음력 1월 10일, 전라도 고부 농민들이 나쁜 정치를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났다. 동학 접주1) 인 전봉준이 이끈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아를 점령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정부에서 보낸 관리가 오히려 농민을 탄압하면서 고부 봉기는 농민 전쟁으로 번졌다.
3월, 전봉준은 4천여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지금의 전북 고창)에서 다시 봉기했다. 동참자가 점점 늘어, 새롭게 본진을 꾸린 백산(지금의 전북 부안)에 모인 농민군은 8천명이 넘었다. 아래와 같은 말이 나올 정도로 백산 일대는 보국안민2) 을 외치는 농민군으로 가득 찼다.
앉으면 죽산(竹山) 농민군이 앉으면 손에 든 죽창만 보이고 서면 백산(白山) 다 일어나면 흰옷 입은 사람만 보인다.
4월 들어 전봉준 ・ 손화중 ・ 김개남 등이 이끈 농민군은 황토현(지금의 전북 정읍)에서 전라도 감영군을 대파했다.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정부가 대포와 기관총을 갖춘 중앙군을 보냈지만, 농민군은 황룡촌(지금의 전남 장성)에서 중앙군을 물리치고 4월 27일 전주성마저 점령했다.
다급해진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5월 초 청나라군이 조선에 도착했고 일본도 톈진조약(톈진조약 체결 참조)을 내세워 군대를 보냈다. 5월 7일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물러났다. 청나라와 일본이 간섭할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고,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며 조선을 압박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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