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영 칼럼/ 본보 이사겸 논설위원
정경영 칼럼/ 본보 이사겸 논설위원

정치의 본질은 현대사회의 다양한 갈등 구조를 조정하고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욕구와 이해를 가감없이 노정시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이른바 공공선을 실현하는 사회적 합의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의 영역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접할 수 있는 일상적인 현상이어서 그 경중을 논함은 무의미하다. 정치인은 정치를 이루는 핵심 요소로서 그 책임과 역할은 무한대이며 대의정치의 특성상 민의를 대변하는 자격을 부여하는 선거는 민주 정치의 축제이자 엄중한 의무이다. 누구는 정치를 외면하는 것은 권리일 뿐 굳이 엄중한 의무로 확대함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침해한다고 한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수사는 정치적 무관심이 가져올 재앙과도 같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경고하고 있다. 저질스러운 정치인 못지않게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선택이 왜 중요한지 정치의 계절에 한번쯤 되돌아 볼 일이다.

큰 선거를 앞두고 수십년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해 온 거대 정당은 물론 개혁의 기치를 앞세운 신당 세력들 모두에게 되묻고 싶다. 우리 사회의 극단적 혐오와 증오, 이분법적 대결의 정치를 청산하기 위하여 어떤 역할과 정책을 제시하고 있는지, 정치의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은 무엇인지 명쾌한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정치 현실은 한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적 습성에 매몰되어 있다. 갈등을 해소하고 상호존중과 상생을 회복하는 길은 멀기만 하다. 선거 때마다 관행처럼 반복되는 그들의 화려한 분장 뒤에 숨어있는 진정성을 가려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증오하고 차별하는 건 민주주의의 근간을 해하는 행위이다. 증오 정치의 바이러스는 유튜브나 SNS를 타고 광풍처럼 확산되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은 고도로 발달된 미디어 환경을 파고들어 그 숙주에 빨대를 꽂고 기생하고 있다. 이른바 전략적 공생관계를 이루고 허위 정보와 중상모략 그리고 편향성과 적개심을 부채질하고 있다. 극단의 팬덤을 양산하고 나와 다르면 흡사 외계인 대하듯 멸시하고 조롱한다. 그들에게 관용은 사라지고 오직 적개심만 남아있다. 최근 몇몇 정치인에 대한 살상 사건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증오 정치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혐오는 단순한 편견에서 출발하여 혐오 표현, 차별, 증오 범죄, 집단학살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단계별 그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분석이 있다. 나치가 홀로코스트까지 이르는 시간이 불과 10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최고 지도자의 최상의 덕목은 소통과 믿음이다. 만나지 않고 듣지 않으면 그 울타리는 굳어진다. 불통은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의 불행과 직결된다. 최근 입틀막이라는 용어가 오르내린다. 지도자에 대한 예의, 계산된 정치 행위, 심기 경호 등을 이유로 지탄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지금은 제왕의 시대도 아니고 신성불가침의 영역도 아닐진대 차단된 정보와 언로를 뚫기 위해 때와 장소를 다소 벗어났다 하여 더러운 타인의 손으로 입이 닫히고 말이 막혀야 하는지 곱씹어 볼 일이다. 듣지 않으면 실패한다. 내가 옳으니 너는 틀리다가 아니라 우린 서로 옳을 수도 다를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아야 대화와 타협이 이루어진다. 정연한 논리와 설득력 그리고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지도자는 성공한다. 세종도 이순신도 모두 그랬다.

어느 학자는 논어의 화동론이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으로 분석한다.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과 공존의 논리이고, 동(同)은 획일적인 가치만을 인정하는 지배와 흡수의 논리라고 압축한다. 증오와 대결에서 존중과 상생으로 나가야 할 오늘의 우리에게 오래된 고전에서 미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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